계공랑공(휘 기)묘갈명

 

계공랑공 휘 기 묘소
소재지: 옥과 입면 제동 천마봉하


十一世祖 啓功郞公 諱 錡 墓碣銘竝書
公諱錡字敬重系出靑松高麗文林郞諱洪孚爲始祖公之十代祖也朝鮮 定廟左相諱德符七代祖也 端廟仗節名臣京畿監司兼領集賢殿大提學諱璿高祖也海州牧使 贈兵曹參判諱安智曾祖也敦寧府都正諱淳祖也中學訓導諱光亨考也昌原丁氏縣監爟女妣也公以嘉靖丁酉玉果霽洞生古家不煩師訓而學問日就常用行事之間馴致其道易所謂直方大不習無不利者然也以蔭授啓功郞軍資監直長高尙其志隱德不就丁酉二月十九日考終于寢壽六十一墓天馬峰下先考墓上原巽坐配安東權氏參奉芑女祖博士世衡曾祖郡守以平外祖司直全義李萬齡戊戌生己酉卒三月二十一日卒墓合窆有一男二女男彦謙同知中樞府事女全州崔震進士主簿次海州吳諫彦謙生四男一女長民獻宣務郞次民覺縣令次民式次民伯觀象監參奉曾孫以下不盡錄盖公之墓木己拱矣累經兵燹尙無顯刻是後孫之責也於今宗議齊發一乃心力將竪貞珉求余表隧之文以不文固辭不獲銘曰
孝涕忠信存心養性是德之修遯世無憫在家無怨是德之安無念爾祖聿修厥德是德之懷 曰我有後庶不棄墓是德之悠

丁卯夏月
後孫 雲植 撰


11世祖 계공랑공 휘 기(錡) 묘갈명병서
公의 諱는 기(錡)요 字는 敬重이며 本貫은 靑松이니, 고려 문림랑 휘 홍부(洪孚)가 시조요, 公에게는 10代祖이시며 조선 定宗朝 좌상 諱 덕부(德符)는 7代祖이시며, 端宗祖 仗節名臣으로 경기감사와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하신 諱 선(璿)은 高祖이시고, 해주목사로 증병조참판 諱 안지(安智)는 증조이시며, 돈녕부도정 諱 순(淳)은 祖이시고, 中學訓導 諱 光亨은 考이시며, 昌原丁氏 현감 관(爟)의 따님이 妣이시다.
公께서는 서기1537年 嘉靖丁酉에 玉果 제동에서 시례고가(詩禮古家)에서 태어나시니 스승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고 학문이 日就하여 상용행사(常用行事)의 사이에 그 도리에 순치(馴致)되었으니 周易에 이른바(直과 方과 大의 純德은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함이 그와 같다 하겠다. 蔭仕로 계공랑군자감직장(啓功郞軍資監直長)을 제수 하였으나 志節을 숭상하고 德을 숨겨 취임을 아니 하였고, 丁酉2月19日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壽는 61이요 墓는 天馬峰下 先考墓 上原 巽坐이다.
配는 安東權氏 참봉 기(芑)의 따님으로 祖는 博士 世衡이고, 曾祖는 郡守 以平이며, 外祖는 司直 全義李萬齡이시다. 戊戌에 낳으시고 己酉3月21日 卒하시니 墓는 합폄하였다. 1男2女를 두었는데 男 언겸(彦謙)은 同知中樞府事요, 長女 全義崔震은 進士로 主簿요, 차녀는 海州吳諫이고, 彦謙이 4男1女를 낳으니 長은 民獻이니 宣務郞이요, 次는 民覺이니 현령이요, 次는 民式이요, 次는 民伯이니 감상감참봉(觀象監參奉)이며, 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公의 墓域에 아름드리 나무가 있으나 累次 兵火를 거치면서 아직도 顯刻이 없으니 이는 후손의 책임이라 하겠다. 이제 宗議가 齊發하여 心力을 모아 墓碑를 세우려고 나에게 墓道에 새길 글을 구함으로 글을 못한다고 固辭하였으나 마지못하여 銘하여 이른다.
孝涕와 忠信으로 마음을 保存하고 理性을 길렀도다. 이 德을 닦으며 숨어살며 滿足했네 집에서 원망 없으니 이 德이 편안함이라 祖上을 생각하며 德을 닦지 아니하랴 이 德을 길이 생각하니 내게 後孫있음이라 이 墓 못 본체 않음도 이 德이 길어서 일세.

西紀1987年 여름
後孫 雲植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