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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공 휘 학령 묘소 묘표석 |
積善士人沈君宜燾東澤宜振
![]() 知得到透徹始可曰聞道是以聖人有朝聞夕死之訓苟非學者造詣之標的乎公乃自謂聞道十餘年則可推其勵志向上不虛了一生也儘令人起欽余不覺擊節三歎略書之如此云 心石齋 宋秉珣 撰 10세조 주부공 휘 학령(鶴齡) 묘표 착한 일을 많이 한 士人 沈君 의도(宜燾) 東澤 의진(宜振)이 그 先祖 도곡공(道谷公)의 行蹟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묘소에 조그만 비석도 없는 것을 여러 후손들이 걱정하여 비석을 세우려는데 陰記가 없어서는 않되겠고 세대가 오래되고 멀어져서 문적(文蹟)이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대략 읍지(邑誌)에 기재된 바와 집에 전해 내려오는 옛날 소문을 이와 같이 주어 모았으니 비문 지어주기를 원한다 하였다. 살펴 보건대 공의 휘는 학령(鶴齡)이요 자는 연수(延壽)이며 청송인이다. 시조의 휘는 홍부이니 고려조의 문림랑이었고 청송군에 봉해졌으므로 청송이 본관이 되었다. 전리판서 휘 원부(元符)는 민농은(閔農隱)과 더불어 두문동에 숨어 의를 지켰고 이 분이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태종조에서 여러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휘 太山은 벼슬이 부사과였으며 청송으로 돌아와서 살았으니 이 분이 공의 증조이고 할아버지의 휘는 손(遜)이요 호가 월헌(月軒)이며 學行으로써 향천(鄕薦)에 올랐고 현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필륜(弼倫)이니 부호군이었고 어머니는 일직손씨(一直孫氏) 漢相의 따님이다. 공은 正德 辛巳 10月15日에 낳으니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망녕되히 말하고 실없이 웃지 않으며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어 나이 스무살이 못되어 周王山에 놀러가서 수선화발녹음명(水仙花發綠陰明:수선화 꽃이 피니 녹음이 밝구나)라는 글을 지었고 成年이 되어서는 소재(蘇齋) 노문의공(盧文毅公 盧守愼)의 門에서 좋은 평판을 받았고 학식과 견문이 많고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므로 칭찬을 받아 노소재가 경외(敬畏)하는 벗이라고 말하였다. 신축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三年상을 끝마치고 道致洞에 집을 지어 그 집 이름을 도곡정사(道谷精舍)라 하고 향리의 수자제(秀子弟)와 더불어 춘추로 강습을 하고 또 글을 지어 말하기를 聞道十餘年 도를 들은지 십여년에, 結廬住道谷 집을 道谷에 지었네. 道原何處尋 도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까, 只有吾書讀 다만 내가 글 읽는 곳에 있네. 라고 하였다. 갑진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예제(禮制) 지키는 것을 아버지의 상 때와 같이 하였고 정미년에 행실이 독실함으로써 천거되어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해에 노소재가 진도(珍島)로 귀양가자 공이 먼 길을 찾아가서 경서(經書)를 강의하고 의문 나는 곳을 질문하며 두어 달만에 돌아와서 강주천(康舟川) 유선(惟善)이 忠州의 감옥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심히 슬퍼하며 말하기를 스승의 門下에서 이 도를 지키는 사람을 잃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리오 하였다. 무진년에 삼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이 노소재의 을사사화 때는 죄적(罪籍)을 신원(伸寃)하고 특별히 포상(褒賞)하자 공이 찾아가서 시(詩)로써 하례 하였고 기사년 봄에 명륜당(明倫堂)에서 講會를 베풀고 겸하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節目을 참작하여 問答하였다. 융경(隆慶) 병술년 7月16日에 향년 66歲로 돌아가니 제자로서 상복을 입은 사람이 수십인 이었고 도치동 남록(南麓) 간좌원에 장사지냈고 배위는 진성(眞城)이씨로 왼쪽에 부장(쯊葬)하였으니 즉 어모장군(禦侮將軍) 상(祥)의 따님이다. 1男1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청(淸)이니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한 공로로써 훈련원 봉사가 되어 島山에서 순절하였다. 딸은 이상현(李尙賢)에게 출가하였고 손남(孫男) 응락(應洛)은 장사랑(將仕郞)이요 응렴(應濂)은 옥과훈도(玉果訓導)이며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은 뛰어난 바탕으로써 자기를 위하는 학문을 하여 도를 일찍 듣고 나아가는 방향이 바르고 스승을 부지런히 좇아서 섬기고 품행이 독실하였으니 백세(百世)의 뒤에 공을 알고자하는 사람은 읍지(邑誌)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내가 어찌 반드시 여러 말을 하리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다 도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니 투철하게 알아야 비로소 도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聖人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는 가르침이 있으니 진실로 학자가 나아갈 표적(標的)이 아니겠는가 공이 이에 도를 들은지 십여년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니 그 의지를 격려하여 향상하고 일생을 헛되히 살지 아니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도다. 어떻든 간에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세번 치며 탄복하고 칭찬하여 대략 이와 같이 쓰노라. 심석재 송병순이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