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공(휘 지겸)묘갈명

 

정랑공 휘 지겸 묘소
소재지: 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묘 표 석


我沈自高麗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始籍靑松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典理正郞追封靑華府院君生諱德符 麗季以功靑城郡忠義伯入 我朝錄功公居第一辭勳不受 定宗元年左政丞諡定安生諱溫 世宗國舅領議政靑川府院君諡安孝生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諡恭肅生諱湲內資寺判官 贈吏曹叅判左贊成生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生連源領議政諡忠惠配享 明宗廟庭寔公之祖也考諱鋼 明宗國舅領敦寧府事靑陵府院君 贈領議政諡翼孝有子八人公居第四生於 中宗庚子正月二十六日卒于戊辰正月初九日享年二十九越二月戊申葬于漣川舊麻田定安公墓同麓丑坐與配咸安李氏雙墳公性明敏聰悟容貌俊美自幼篤於孝友又好讀盡及長慱通經史又善書藝人有揚之者猶有慚色其讓於人如此勤工於擧子業欲以是爲進路人皆期其有成也不幸早罹巨創哀慟之極不覺毁傷爲崇竟歿侍廬之側雖非聖人制禮之本意可以知公天植之孝也嗚乎痛哉人孰不起且敬惜自當名不朽於百世也配咸安李經歷霽之女咸安君世應之孫生年無傳九月初五日生壬戌三月初三日卒墓雙墳繼配陽川許氏生年無傳八月二十一日生壬戌二月十六日卒漣川先塋靑龍第一岡艮坐无育初配李氏有一男曰憬童蒙敎官 光海朝卒於鏡城謫所敎官有四男長廷寅進士通禮院引儀次廷亮義禁府都事次廷弘進士長水察訪次廷熙宣敎郞廷寅子曰進士刑曹佐郞廷亮子曰植廷弘子曰集曰樂曰采廷熙子曰梲曰杭曰槻武科宣傳官曰曰橈餘不盡記
公之後孫諸氏深痛公之墓儀久闕合伐石而求文於余辭以不文請愈勤豈敢恝於傍祖後事也略撮梗槪而記其陰
傍孫 載克 謹撰
惟我十一世祖正郞公之墓表本是未成盖欲多採地師之議而取其勝地更窆之計故世遠有志未遂今至墜我家聲不啼後孫寒心之寃於斯而極矣不肖孫等與宗族勤竭寸誠今纔立表豈不悚懼哉
一九七五年乙卯三月十五日
正郞公派宗會 謹立

11세조 정랑공 휘 지겸(智謙) 묘갈명
우리 沈氏는 고려때 문림랑위위시승(諱 洪孚)으로부터 비로소 靑松을 본관으로 삼았다.
문림랑공은 합문지후공(諱 淵)을 낳고 지후공은 전리정랑을 역임하고 청화부원군에 추봉된 諱 龍을 낳았다. 청화부원군은 청성백(諱 德符)을 낳으니 청성백은 고려말엽의 공훈으로 靑城郡忠義伯의 칭호를 받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공훈이 으뜸으로 기록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으며 1399년(定宗元年) 좌정승에 제수되고 定安公이란 시호를 받으셨다.
정안공은 안효공(諱 溫)을 낳으니 公은 세종대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에 제수되고 靑川府院君의 봉호와 安孝公이란 시호를 받으셨다. 안효공은 공숙공(諱 澮)을 낳으니 公은 영의정에 오르고 靑松府院君에 봉군되고 恭肅公이란 시호를 받으셨다.
공숙공은 판관공(諱 湲)을 낳으니 公은 내자시 판관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이어 좌찬성의 증직을 받으셨다.
판관공은 사인공(諱 順門)을 낳으니 公은 의정부사인 벼슬을 하고 영의정에 증직되셨다.
사인공은 충혜공을 낳으니 公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忠惠公이란 시호를 받고 明宗의 묘정에 배향 되었으니 이 분이 正郞公의 조부이다.
정랑공의 부친 휘는 강(鋼)이며 明宗의 장인으로 영돈녕부사를 역임하고 靑陵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 영의정에 증직되고 翼孝公이란 시호를 받으셨다.
익효공의 아들은 여덟분인데 정랑공은 넷째분으로 1540년(中宗庚子) 1월 26일에 탄생하고 1568년(戊辰) 1월 9일 향년 29세로 별세하니 2월에 연천(구. 마전) 정안공 묘소와 같은 기슭에 丑坐로 配位咸安李氏와 더불어 쌍분으로 장례모셨다.
正郞公은 천성이 영민하고 민첩하여 용모가 준수 하였을 뿐아니라 어릴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경서와 역사에 통달 하였다. 또한 서예에도 능하였으나 자신의 글씨를 걸어둔 것을 보면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니 겸양지심이 이러하였다.
과거공부에 열중하여 이로써 진로를 삼고자 하였는바 모든 사람들이 公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애통이 극진한 나머지 그 연유로 시묘 살이 하던중에 마침내 별세하니 이는 비록 성인의 제례는 아니나 출천지효를 이룩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슬프고도 애통하다. 그 누가 公을 존경하지 않으며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公의 명성은 당연히 백세를 지나도 인멸되지 않아야 한다.
배위는 咸安李氏로서 경력벼슬을 한 李霽의 따님이며 咸安君 李世應의 손녀이다. 생년은 실전이고 九월 五일에 탄생하여 1562년(壬戌) 3월 3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公과 쌍분이다. 후취부인은 陽川許氏로서 생년은 실전이고 8월 21일 탄생하여 1622년(壬戌) 2월 16일 별세하니 연천 선영 청룡제일강에 艮坐로 장례를 지냈으며 소생은 없다.
초취배위 李氏에게서 1男이 있으니 교관공(諱 憬)이다. 교관공은 성균관 동몽교관을 역임 하였는데 光海君때 유배지 鏡城에서 별세하셨다.
교관공은 四男을 두었는데 장남(諱 廷寅)은 진사시에 급제하고 통례원 引儀벼슬에 오르고 다음(諱 廷亮)은 의금부도사를 지내고 다음(諱 廷弘)은 진사로 장수찰방을 역임 하였으며 다음(諱 廷熙)은 선교랑의 예우를 받으셨다.
장자의 아들(諱 )은 진사로 형조좌랑을 지내고 차자의 아들은 諱 植이며 차자의 아들은 諱集 諱樂 諱采이고 차자의 아들은 諱梲 諱杭 諱槻는 무과선전관이며 諱 諱橈이다. 그밖에 나머지는 기록하지 못한다.
公의 후손들이 公의 묘갈을 오래 동안 세우지 못한 것을 깊이 애통한 일로 여기고 뜻을 모아 돌을 다듬어 놓고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나는 문장에 능하지 못함을 말했으나 요청이 더욱 간절하니 어찌 방조의 후손들을 괄시할 수 있으리오 대략 줄거리만 추려서 이에 기록한다.
방손 載克 삼가 지음
우리 11세조 正郞公의 묘갈을 진작 이루지 못한 것은 대체로 지사(地師)와의 의론 끝에 길지를 얻어 이장할 계획을 가졌으므로 인하여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가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렸으니 후손들의 한심은 말할 수 없다. 불초 후손들은 종족과 더불어 성의를 다하여 지금 겨우 묘갈을 세우니 어찌 송구스럽지 않겠는가
1975年(乙卯) 3月 15日
正郞公派宗會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