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공(휘 종명)행장

 

증병조참의공 휘 종명 묘소
소재지: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산 60-1


十一世祖 督戰使 贈兵曹參議 沈公 諱 宗明 行狀
壬辰臨津之役督戰使沈公死之先是倭寇軼我忠烈公宋象賢死於東萊從事尹公暹朴公暹死於尙州申將軍砬金從事汝岉死於川 車駕播遷西幸公以前海南縣監特拜爲都摠府都事扈 駕時都巡察使韓應寅守臨津朝議韓應寅素不知兵宜簡智勇俱全者監其軍特以公爲督戰使兼督運事赴自 行在賊在臨津南我師在臨津北相持久一日賊焚壘幕載兵器爲退遁狀韓應寅曰吾將背水而陣出輕騎以追之無不勝也公曰後世豈復有韓信乎方今昇平日久變出倉卒直懤 京城如入無人成敗之形已著夫難測者賊謀其退遁豈非詐 耶與其不量智力而爲背水陣莫若堅守要害不與之戰但令賊不得西待諸道送授兵力稍振然後徐可以圖之不然孤軍抗大敵有如肉投餒虎不待智者而知矣韓應寅竟不聽使申硈劉克良及公渡江而陣公於是奮然太息曰庸夫不足與謀大事已而賊從山後矢礟俱起材交鋒一軍盡入于水韓應寅在江北岸上望見奪魄而走公與主簿安聒及三奴且馳且射所殺傷甚多矢盡力竭遂死于賊實是年五月十八日也公之死一奴名忠徽者獨牽公所騎馬歸于嘉平之寓次公之劒尙掛于鞍及亂定以遺衣與劒葬于坡州牛浪洞巳坐原公素以勇力稱善射御閑鞱略治家以孝悌奉先盡誠敬其家乘云公之事徵於臨津 致祭之文公之名見於吏曹戰亡之錄其 褒贈錄後之 命載諸職牒及 敎書尙至今可信也公姓沈諱宗明字公晦上祖高麗文林郞衛尉丞諱洪孚入我 朝有諱德符有諱溫有諱澮三世繼爲相於公爲五代六代七代祖高祖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曾祖諱順道敦寧府正祖諱巨源學生公諱鏵進士 贈吏曹參判以左議政通源子出後實贊成公第三子順門孫也妣 贈貞夫人韓山李氏司成秫之女也公生於嘉靖己未萬曆癸未登武科拜宣傳官出爲海南縣監及殉節壽三十四夫人 贈淑夫人豊山金氏父郡守銑後公三十七年而歿쯊葬公墓擧一男二女男諱暐蔭典籤長女崔天用武主簿次女李焜暐一男儒珍 贈掌樂正庶子儒醇庶女李尙馨崔天用三男晩得武府使始得英得焜三男東顯兵使東耉府使東相府使儒珍四男長稷 贈承旨參奉次晳次樑府使出后安世次橚三女長辛聖老次金萬善次權斗瑞七子若汶宣傳官若濂若汧若澄若涵若溥若澐若汶子健女成翼齡無后健子致賢希賢女李元泰致賢子 實公之七世冢孫其他曾玄不復盡錄噫公之節易所謂過涉滅頂也豈不誠其卓然哉而彼宋忠烈諸賢皆赫赫有聞於後而公獨泯然不少槪見何哉豈世之人視節義以官之卑高耶抑子孫淪替不能顯揚其卓節而然歟君子於是悲之余與公同祖靑松季弟銖出后公之支孫熟聞公殉節事而嘗從師渼上思有以樹立以光祖烈持公遺事泣而請余爲之狀將以攀控當世有德有文之君子余不敢辭而僣焉

僉知中樞府事 沈定鎭 撰


11세조 독전사 증병조참의 심공 휘 종명(宗明) 행장
임진년(1592년) 임진강(臨津江)의 싸움에서 독전사 심공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앞서 왜구(倭寇)가 우리나라를 침공(侵攻)하였을 적에 우리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이 동래(東萊)에서 전사하였고 종사관(從事官) 윤공(尹公) 섬(暹)과 박공(朴公) 지(篪)가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으며 신장군(申將軍) 립(砬)과 김종사 여물(汝岉)이 달천(川)에서 전사하였고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避難)하였다. 공이 전 해남현감(前 海南縣監)으로써 특별히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로 임명되어 임금을 호종(扈從)할 때 도순찰사(都巡察使) 한응인(韓應寅)이 임진강을 수호(守護)하게 되니 조정(朝廷)의 의논이 한응인은 본디 병사(兵事)를 알지 못하므로 마땅히 슬기와 용맹이 모두 갖추어진 사람을 뽑아 그 군사(軍事)를 맡겨야 한다고 하여 특별히 공으로써 독전사 겸 독운사(督運事)를 맡겨 임금의 행재소(行在所)로부터 싸움에 나가게 되었다. 적(賊)은 임진강 남쪽에 있었고 우리 군사는 임진강 북쪽에 있어 서로 하루를 같은 상태로 끌어가자 적이 군막(軍幕)을 불지르고 병기(兵器)를 실어 퇴각(退却)하는 척 하니 한응인이 말하기를 내가 배수진(背水陳)을 치고 날랜 기병(騎兵)을 출동(出動)시켜 추격(追擊)하면 싸움에 이기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후세에 어찌 한신〔韓信, 중국 한(漢)나라 고조의 장신(將臣)으로 한나라 창업(創業) 삼걸(三傑)의 한사람, 회음(淮陰)사람, 고조의 통일대업(統一大業)을 도와서 초왕(楚王)에 봉(封)함을 받았으나 뒤에 열후억멸책(列侯抑滅策)에 의하여 피살(被殺)되었다〕 같은 사람이 없겠으리오 지금 태평한 세상이 오래 되었으나 창졸간(倉卒間)에 변고(變故)가 나서 바로 서울의 도성(都城)이 무너지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인 것 같으니 성패(成敗)의 형세는 이미 나타났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적이 물러날 것을 도모한 것이 어찌 거짓이 아니리오 그 슬기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배수진을 치는 것이 굳게 요해(要害)를 지키고 싸우지 않으며 다만 적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여러 도(道)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충한 연후에 천천히 도모하여야 할것이요 그렇지 않고 외로운 군사가 대적(大敵)과 항전(抗戰)하는 것은 마치 고기덩이를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지는 것 같아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것이라』
하였다. 한응인이 마침내 듣지 않고 신할(申硈)과 유극량(劉克良)과 공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 진을 치게 하니 공이 이에 분연(奮然)히 크게 한 숨 쉬고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과는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이 산의 뒤로부터 공격하여 화살과 대포를 일제히 쏘아대니 모든 군사는 강물에 빠져 죽고 한응인은 강 북쪽 언덕에서 바라보다가 넋이 빠져 달아났고 공이 주부(主簿) 안할(安硈)과 삼노(三奴)와 같이 추격(追擊)하여 살상(殺傷)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드디어 전사하였으니 실은 이 해 5월 18일 이었다. 공이 전사하자 한 종의 이름 충휘(忠徽)라는 사람이 홀로 공이 타던 말을 끌고 가평(嘉平)의 집에 돌아와서 공의 칼을 항상 말안장에 걸어 놓았고 난리가 끝나자 옷과 칼을 같이 파주(坡州) 우랑동(牛浪洞) 사좌원(巳坐原)에 장사지냈고 뒤에 宣祖大王 癸卯年 왕명(王命)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공은 본디 용맹과 힘이 뛰어났고 활 쏘고 말 타는데 능하며 병법(兵法)을 잘 알았고 집을 효제(孝悌)로써 다스리고 조상을 받드는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그 가승(家乘)에 말하기를 공의 사적(事蹟)은 임진강 치제문(致祭文)에서 징험(徵驗)할 수 있고 공의 이름이 이조전망록(吏曹戰亡錄)에 나타나 있고 뒤의 여러 직첩(職牒)과 교서(敎書)에 기록하라고 명령한 것이 있으니 지금까지 믿을 수 있도다.
공의 성(姓)은 沈이요 휘(諱)는 종명(宗明)이며 자(字)는 공회(公晦)이다. 시조는 고려조의 문림랑(文林郞) 위위승(衛尉丞) 휘 홍부(洪孚)요 조선조에 들어와 휘 덕부(德符)와 휘 온(溫)과 휘 회(澮)는 삼대를 이어서 정승이었고 공에게 5대 6대 7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원(湲)이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이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의 휘는 순도(順道)이니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거원(巨源)이니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이고 아버지의 휘는 화(鏵)이니 進士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좌의정 통원의 아들로 출후(出后)하였으니 찬성공의 제3자 순문(順門)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출(秫)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기미(嘉靖己未 1559년)에 낳아서 萬曆癸未(1583)년 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해남현감으로 나가서 순절(殉節)하였으니 수(壽)가 34였다. 부인은 풍산김씨(豊山金氏) 군수 선(銑)의 따님으로 공보다 37년 뒤(仁祖戊辰 2月 12日)에 졸하여 부장(祔葬)하였다. 1남2녀를 두어 아들은 위(暐)니 음직(蔭職)으로 전섬(典韱)이요 장녀는 무과 주부 최천용(崔天用)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이혼(李焜)에게 출가하였다. 暐의 1남은 유진(儒珍)이니 증장악원정(贈掌樂院正)이요 서자(庶子)에 유순(儒醇)과 서녀(庶女)에 이상형(李尙馨)이 있다. 崔天用이 3남을 두었으니 장남 만득(晩得)은 무과 부사(府使)요 다음은 시득(始得)과 영득(英得)이다. 혼이 3남을 두었으니 동현(東顯)은 병사(兵使)요 동구(東耉)와 동상(東相)은 부사(府使)이다. 유진이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직()으로 참봉이요 승지에 추증되었고 다음은 석(晳)이요 다음은 량(樑)이니 부사로 안세(安世)에게 출후하였고 다음은 숙(橚)이고 3녀는 신성로(辛聖老)와 김만선(金萬善)과 권두서(權斗瑞)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 칠남을 두었으니 약문(若汶)은 선전관이요 약렴(若濂), 약견(若汧), 약징(若澄), 약함(若涵), 약부(若溥), 약운(若澐)이다. 약문의 아들은 건(健)이요 딸은 성익령(成翼齡)에게 출가하였으나 무후(無后)이다. 건의 아들은 치현(致賢)과 희현(希賢)이요 딸은 이원태(李元泰)에게 출가하였다. 치현의 아들은 성()으로 실지 공의 7세 종손이요 기타 현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의 절개는 주역(周易)에서 말한바 과섭멸정(過涉滅頂), 즉 강물을 건너려고 이마까지 물에 들어간 것이니 어찌 진실로 탁월(卓越)하지 아니하였으리오 저 충렬공 송상현 제현(諸賢)은 모두 혁혁(赫赫)하게 후세까지 이름이 알려졌거늘 공만 홀로 알려진 것이 없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어찌 세상 사람들은 절의(節義)보는 것을 벼슬이 높고 낮은 것으로 하는 것일까 다만 자손이 몰락(沒落)하여 능히 그 높은 절개를 들어내지 못하여 그런 것일까 군자가 이에 슬퍼하였도다.
나는 공과 동조(同祖) 청송이요 계제(季弟) 수(銖)가 공의 지손(支孫)에게 출후 하여 공의 순절한 일을 익히 들었고 성()이 일찍이 미상사(渼上思)에게 종사(從師)하여 비석을 세워 조상의 열행(烈行)을 빛내려고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울면서 행장을 지어달라고 나에게 요청하므로 내가 그 당시 덕이 있고 글을 잘 하는 군자에게 고(告)하려고 감히 사양하지 않고 외람되게 행장을 지었노라.

첨지중추부사 심정진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