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휘 봉원)묘갈명

9세 효창공 휘 봉원 묘소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신 도 비


同知敦寧府事曉窓公諱逢源墓碣銘
惟沈氏遠有代序自高麗吏曹正郞贈門下侍中諱龍始大顯諱德符爲左侍中封靑城伯入本朝稱左政丞封襲舊號諱溫領議政府事諡安孝篤生昭憲王后是於公爲高祖曾祖諱澮左議政策勳翊戴佐理靑松府院君諡恭肅祖諱湲內資寺判官贈左贊成考諱順門議政府舍人贈領議政妣平山申氏麗祖元功諱崇謙之後司憲監察諱永錫之女有子四人俱以文達其長諱連源名能愛士以仁順王后皇祖父長政府標望不少損公之倫次在三諱逢源字希容幼時擧止不群沉厚無戱言遭家不淑大夫人親授書如小學已喩其旨義稱長能自課學爲詩文人多傳賞年二十升上舍朋遊漸附華聞彌大己卯禍起與元兄公遊砥平山水將老焉以親在堂不可已而疾作不離床席甲午少間蔭補內侍敎官尋罷丁酉登第權知學諭兼司錄戊戌擢擢英試其後例遷學錄學正博士典籍乃癸卯遍歷淸顯然多在告寧右授則戶禮刑佐郞正言獻納掌令司諫檢詳舍人敎理應敎典籍直提學左叙則校書校理司藝典籤典設守司僕訓鍊副正司導軍器宗簿尙衣正判校右通禮癸丑秋由直學進秩承政院同副承旨旋辭爲僉樞間除地春曹叅議戊午復爲承宣不拜 明宗大王知其二尊旣隆病未陳力降御札授嘉善大夫同知敦寧府事癸亥七月也盖自庚戌以來憂慘衰憊丏間非一旣數年瘁痞增劇解務謝事無復當世之意甲戌十月二十一日壬戌終距其生弘治丁巳某月某日壽不及耋再期公溫柔忠慤淸遠簡重內絶機變外無華飾退然如不勝衣少時門有富婆年老無嗣取鞠以爲托乃遁歸不顧大宗家失業祀事以虧公晩而愈痛爲之規畫約族黨以備之猶以歉爲然凡遭親舊喪悉心經紀俸布之入盡歸諸賻郭司諫珣被殺相好者莫敢過其門公獨襚之不疑常抱痾自衛食衣坐臥必以數限如四不出三不語皆人所難勉焉而方且自以爲適家在華山麓有園林之趣種松爲友因以名堂日哦其間遇風和體舒曳杖而出徐步苔邊長身癯貌須眉皎潔怳若孤鶴引吭視九萬然有來欵者琴歌發酒賦間作自謂樂亦在其中惟以病爲平生二恨早知方志學中途而廢及家貧須祿十年不仕每逢相知語嘖嘖不能已然寡欲養靜保眞還元漸見湯劑頓體精力更進能省十年前所讀書了了時復討起論語或至成誦喜靖節忘懷得失正獻不以事物徑心等語諷詠娓娓如圖畫音律識其妙醫術書法涉其門詩韻尤冲逸不俗嘗自號曉窓老人作說以自見盖欲以明理欲消長之分也夫人金氏鷄林望曺正郞顯祖女輔德琠孫大司憲升卿曾孫有一男三女曰鍵承文正字次未行而夭次適咸興判官尹慶福次適衿川縣監曺胤申正字聘弘文校理李灘叟先生門生二子喜壽承文正字娶恩津縣監盧克愼女昌壽娶典籍尹之瑞女生一男一女幼判官生一子僖娶承旨趙溥女縣監生四子泂澣三女長適士人任蒙正餘皆幼竊念公哭夫人越子女相繼靡遺所謂於人世何如者而適孫喜壽養能盡其孝疾能盡其敬歿能盡其禮夫天之定於福善不爽至此益較然矣其歲暮十六日奉窆于夫人兆右卽高陽郡治南大宛里未向原也至明年秋纍然衰經出墳庵來以狀問銘嗚呼公之子予之婭予之從女公之孫婦知公行應銘法莫予若也烏得以不文辭銘曰
於赫靑鳧積慶寶圖以有公軀德牲其培聰明卽開以篤公材頎而丈夫善人之徒君子之儒冲然而寂淸不近激游不傷溺事辭苟難理遣非干惟順之安人爵自至素餐是愧益遜其志能不徇欲以爲身毒巍乎其躅不以憂悸爲此心累恢乎其器獨樂其天克終其年寔遠其傳礱者植焉過者式焉來者則焉
大提學 盧守愼 撰

동지돈녕부사효창공휘봉원묘갈명(번역문)
심씨는 멀리서부터 대수를 이어왔으니 고려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받은 이름 용(龍)으로부터 크게 통달하기 시작하여 이름 덕부(德符)는 좌시중(左侍中)으로 청성백(靑城伯)에 봉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좌정승(左政丞)에 구호를 이어 받았다. 이름 온(溫)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시호가 안효공(安孝公)이고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낳으시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고 증조부의 이름은 회(澮)니 좌의정(左議政)으로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며 청송부원군에 시호가 공숙공(恭肅公)이고 조부의 이름은 원(湲)이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으로 증직이 좌찬성(左贊成)이다.
고휘(考諱)①는 순문(順門)이니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증직이 영의정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이니 고려 태조 때의 원공(元功)②이었던 숭겸(崇謙)의 후손으로 사헌부의 감찰(監察) 영석(永錫)의 딸이다.
四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다 문장으로 통달하였다. 장남의 이름은 연원(連源)으로 선비들을 아끼었다는 명성이 높았고 인순왕후(仁順王后)③의 친당 조부로서 조정에서도 어른으로서 인망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공은 四형제 중 셋째로서 이름은 봉원(逢源)이고, 자는 희용(希容)이다.
어릴적부터 거동이 뛰어났고 침중하여 희롱하는 말이 없었다. 가환으로 불행한 일이 있어서 어머니께서 친히 소학 같은 글을 가르쳤는데 그의 심수가 이미 깨우쳐 있었다. 점차 장성함에 능히 스스로 과거 공부를 하고 시문 따위로 남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나이 20세에 포부를 높이 두어서 친구들이 많이 따르고 좋은 소문이 크게 퍼졌다.
기묘(己卯:1519) 사화(士禍)때 맏형과 더불어 산수간(山水間)으로 피하여 그대로 늙고자 했으나 부모가 집에 계셔서 할 수 없고 병이 생겨서 멀리 떠나지 못했다.
갑오(甲午:1534)년에 조금 잠잠하여 음보(蔭補)④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두고 정유(丁酉:1537)년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학유(權知學諭)⑤에 사록(司錄)을 겸했다가 이듬해에 탁영시(擢英試)에 발탁되어 그 뒤로부터 상례대로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 전적(典籍)을 거쳐서 계묘(癸卯:1543)년까지 높고 귀한 지위를 두루 거쳤는데 휴가도 많이 받았다. 우직으로는 호조 예조 형조의 좌랑(佐郞) 정랑(正郞) 정언(正言) 헌납(獻納) 장령(掌令) 사간(司諫) 검상(檢詳) 사인(舍人)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적(典籍) 직제학(直提學) 등이고 좌직으로는 교서(校書) 교리(校理) 사예(司藝) 전첨(典籤) 전설수(典設守) 사복시(司僕寺) 훈련원 부정(副正) 사도시(司寺) 종부시(宗簿寺) 군기시(軍器寺) 상의원(尙衣院)의 정(正) 판교(判校) 우통례(右通禮) 등을 거쳤다. 계축(癸丑:1553)년 가을에 직제학(直提學)을 경유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진급되었다가 곧 사임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얼마 후에 호조와 이조참의(叅議)에 임명되었다.
무오(戊午:1558)년에 다시 승지(承旨)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으니 명종께서 그의 덕과 나이 많음을 알고 이미 병이 중하여 힘든 일을 못할 것을 짐작하여 어찰(御札)을 집으로 보내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제수(除授)⑥했다.
계해(癸亥:1563)년 7월에는 지난 경술(庚戌)년 이후 속병으로 고통을 겪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수년 전부터 더욱 극심하여 모든 공직을 다 사퇴하고 다시는 당세의 일에 간여할 뜻이 없었다.
갑술(甲戌:1574)년 10월 21일 임술(壬戌)일에 죽으니 지난 정사(丁巳:1497)년으로부터 수를 70세에서 2년이 모자랐다.
공은 온유하면서도 충직하고 청렴하면서 간결 중후하였다. 안으로는 기변(機變)⑦을 끊고 밖으로는 화려하게 꾸밈이 없었고 기력이 없어 느른하여 옷을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소시적에 문중에 돈 많은 노파가 있어서 나이 늙었으나 후사가 없어서 공을 데려다가 길러서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회피하고 돌보지 못하여 대종가가 가업을 잃고 궐사(闕祀)⑧하게 되어 공이 만년(晩年)에 가서는 더욱 비통하게 여겨서 방법을 세우고 일가들과 약속하여 대비를 하였으나 오히려 허전하게 여겼다. 대개 친구상을 당하고도 심력을 다하여 뒷처리를 맡아 주었으니 모든 수입을 모조리 털어서 부조로 돌린 일도 있고 사간(司諫) 벼슬하던 곽순(郭珣)이 죽음을 당했을 때도 평소 좋아하던 사람들도 감히 그집 문전을 지나가지 못했는데 공은 홀로 의심 없이 염을 해주었다. 평소 깊은 병에 시달리면서도 의식을 스스로 감당하고 앉고 눕는 것을 회수로 제한하니 네 번이 아니면 나가지 않고 세 번이 아니면 말하지 않으니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들을 혼자서 알맞게 하였다. 집이 화산(華山) 기슭에 있었으니 정원에 나무 심는 취미가 있어 소나무를 심어 벗을 삼고 이를 명당으로 여겨 날로 그 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바람도 쐬고 몸을 화평하게 하여 지팡이를 끌고 천천히 이끼낀 석대의 변두리를 거니는 키 크고 파리한 모습에 눈썹과 수염은 교결(皎潔)⑨하니 쓸쓸하고 외로운 학과 같았다.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다가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때때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도 부르고 한 두잔의 술로 시(詩)와 부(賦)도 짓고서 스스로 낙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 오직 병으로써 평생 두 가지 한을 삼았으니 일찍이 학문에 뜻을 세웠으나 중도에서 그만하고 집이 빈한하여 봉록이 필요하나 10년을 벼슬하지 않았으니 늘 친구들을 만나면 한탄해 마지 않았으나 욕심을 억누르고 조용히 요양하여 회복되도록 노력했다. 간간이 탕제를 들고 쉬어 점차 정력을 되찾아서 10년 전에 읽던 책을 능히 볼 수 있고 마침내 기억력을 회복하여 논어를 모조리 외울 수 있고 즐겁게 안정하여 득실에 끌리지 아니했다. 바르게 살고 사물에 마음을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으로 풍자하고 읊조렸으니 끈덕지고 원활하여 음률(音律)에도 그 묘미를 알게 되고 의술(醫術)과 서법(書法)에도 그 전문성을 넘게 되고 시운(詩韻) 역시 속되지 않게 뛰어났으니 일찍이 자호를 효창노인(曉窓老人)이라 하고 자기 견해를 해설했으니 대개 밝은 이치로서 소장(消長)⑩의 분변을 밝히고자 했다.
부인 김씨는 계림(鷄林)⑪의 이름난 집안의 후손이니 정랑(正郞) 현조(顯祖)의 딸이다. 보덕(輔德) 전(琠)의 손녀이고 대사헌(大司憲) 승경(升卿)의 증손이다. 1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 건(鍵)은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이고 맏딸은 출가 전에 죽고 둘째 딸은 함흥판관(咸興判官) 윤경복(尹慶福)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금천현감(衿川縣監) 조윤신(曺胤申)에게 시집갔다. 건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이탄수(李灘첤) 선생댁에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희수(喜壽)는 승문원 정자로서 은진현감 노극신(盧克愼)의 사위이고 창수(昌壽)는 전적(典籍) 윤지서(尹之瑞)의 딸에게 장가들어 남매를 낳았는데 어리다. 판관이 아들 희(僖)를 낳아서 승지 조보의 딸에게 장가들고 현감이 아들 넷을 낳으니 형(泂)과 한(澣)이고 세 딸 가운데 맏딸이 선비 임몽정(任蒙正)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가만히 더듬어 보니 공은 부인이 먼저 죽고 다음에 자녀들이 따라 죽으니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마침 손자 희수가 잘 봉양하여 그 효고을 다했고 병석에서는 공경을 다했으며 죽은 뒤에는 예를 다 갖추었으니 무릇 하늘이 복선(福善)을 정할 적에 아주 어긋나지 않음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소명하다. 그해 세모(歲暮) 16일에 부인의 묘소 오른편에 장사지내니 곧 고양군 남쪽 대원리(大冤里)의 미향원(未向原)⑫이다. 이듬해 가을에 헝클어지고 쇠약한 채 분묘의 초막에서 나와 가장(家狀)을 갖고와서 명(銘)을 부탁해 왔다.
아, 공의 아들은 나와 동서간이고 나의 질녀는 공의 손부이니 공의 행적을 알고 명을 쓰는데는 그 진상을 나보다 더 알 사람은 없을 것이니 어찌 글솜씨가 없다고 사양하겠는가.
명(銘)에 가로되,
혁혁한 청둥오리여, 경사를 쌓아 보옥을 도모했도다. 공의 몸이 있었기에 덕성을 배양했네. 총명하게 열렸으니 공의 재질 독실하고 헌걸찬 장부로서 선인(善人)의 무리로다. 군자의 유풍으로 온화하고 조용하네. 청한하며 격사지 않고 노닐어도 상처없고 모든 일을 어렵게 여기네. 순리 따라 간여 않고 순하게 하여 편안하네. 좋은 벼슬 다 지내고 공 없음을 부끄러워하니 그 지조가 겸손하네. 능히 욕심 다 버리고 자기 몸을 혹사하네. 높도다, 그 자취여! 근심 걱정 두렵지 않네. 심루(心累)⑬를 걱정하니 그 기국(器局)⑭ 한량 없고 홀로 천성 즐겼으니 그 수한(壽限)을 잘 마쳤네. 그 전함이 요원하니 갈고 닦아 심었도다. 지나간 자 본을 삼고 오는 이들 법 받겠네.
      대제학 노수신 찬

註① 고휘(考諱):고(考)는 죽은 아버지. 휘(諱)는 죽은 아버지의 이름.
② 원공(元功):으뜸되는 공훈.
③ 인순왕후(仁順王后):조선 13대왕 명종의 비이며 심강(沈鋼)의 딸임.
④ 음보(蔭補):과거를 치르지 않고 추천으로 등용된 벼슬.
⑤ 권지학유(權知學諭):고려·조선 때 임시직일 경우 그 벼슬 이름 앞자리에 권지(權知)라고 붙임. 견습 서리 시보라는 뜻. 학유(學諭)는 성균관의 종九품직 벼슬.
⑥ 제수(除授):벼슬을 줌.
⑦ 기변(機變):임기응변을 줄인 말이니 간사한 재간이란 뜻.
⑧ 궐사(闕祀):제사를 궐한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후손이 끊겨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었다는 뜻.
⑨ 교결(皎潔):희고 깨끗함.
⑩ 소장(消長):소멸하고 성장하는 것. 즉 흥망.
⑪ 계림(鷄林):경주의 엣 이름. 여기서는 경주 김씨.
⑫ 미향원(未向原):미향은 서남간에 가까운 방향. 원(原)은 언덕이니 곧 묘터를 이름.
⑬ 심루(心累):공 없이 국록만 축냄.
⑭ 기국(器局):그릇이니 여기서는 인품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