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인 파평윤씨 부좌 지묘


九世祖 贈吏曹判書 行左通禮 修撰公 諱 達源 之墓
貞夫人 坡平尹氏 祔左 墓誌文
藥山之原 有封若堂 先祖修撰府君之墓也 始府君以子貴 贈參判 英宗庚寅 追感 己卯諸賢 贈吏曹判書 命其孫佐郞埜 焚黃于墓 特恩也 當記諸墓顔 以賁其蹟 越二十五年庚寅 舊表無故而仆 諸宗咸與 咨嗟驚異 亟欲易竪者 將七十年而未暇 家弟應奎 始尸其事 後孫之邑宰者 亦相其役 乃以癸巳春 克樹諸墓 噫 其 有待也歟 諸宗以余職忝太史 請書其槪 若府君之德行官歷 祥載史傳碑狀 玆不復贅
十一代孫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事 原任
奎章閣提學 象奎 記幷書
癸巳三月 日 立

9세조 증이조판서 행좌통례 수찬공 휘 달원(達源) 지묘
정부인 파평윤씨 부좌 묘지문
약산(藥山)의 언덕에 봉분이 있으니 선조 수찬부군(修撰府君)의 묘소이다. 처음에 부군은 아들이 귀히 됨으로써 참판에 증직되었고 영종(英宗. 영조) 경인(庚寅)에 기묘제현(己卯諸賢)을 추념하여 이조판서에 증직하고 그 자손인 좌랑 야(埜)에게 명하여 그 묘소에 분황(焚黃)①하게 하니 특별한 은총인 것이다. 마땅히 묘전에 기록하여 그 사적을 나타내야 하나 25年이 지난 경인년(庚寅 英祖 46年:1770)에 묘표가 까닭 없이 넘어지니 여러 일가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바꾸어 세우고자 한지 70年이 되었으나 그럴 경황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사제(舍弟) 응규(應奎)가 그 일을 주관하고 후손으로서 고을의 수재(守宰)가 된 사람들이 찬조하여 계사년(癸巳 純祖 34년:1833) 봄에 묘전에 다시 세우게 되었으니 아! 때를 기다림이 있었더란 말인가? 여러 일가분들이 내가 춘추관에 관여하고 있다 하여 그 줄거리를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부군의 덕행과 관력(官歷)은 역사와 비명(碑銘) 행장 등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음으로 여기에서는 덧붙이지 아니한다.
11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사원임 규장각제학
상규(象奎)는 기술하고 아울러 글씨를 쓰다.
계사(癸巳) 3月 日에 세우다.

주(註)
① 분황(焚黃):조상에게 증직이 되었거나 시호가 내렸을 경우 교지의 부본을 묘전에서 태워 조상에게 알리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