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랑공(휘 근)사단음기

有先祖之邱墳可封植薦祭因守護不勤兵燹屢經歸於失傳歲一祭無所設而築壇象之依  夫子望而祭之之訓此仁人孝子쿎然莫及而今諸孫收宗議圖樹新珉拔涉山河之遠謁文于余其十五代孫相錄亦可貴也顧惟禮敎解紐原野之儀置諸忘域者滔滔而德門之追遠也力力於歸厚如是不敢以不文有所越視而復之曰墓而祭之禮之正也壇而祀之禮之權也復何傷乃按之沈氏貫靑松麗季文林郞諱洪孚爲受貫之肇傳至諱德符佐漢鼎叅勳功封靑城伯諡定安寔公之高祖也是生諱繼年仕麗知成州事李太祖易國後屢徵不就隱於珍原山中秉義自靖自號曰遁齋享長城良溪祠者曾祖也又傳至諱涓號曰愛菴李太宗十二年甲午登第司憲府監察殿中御史翌乙未卒丙申贈吏叅同醊良溪祠是生諱宗夏忠順衛左承旨祖與禰也妣系貫俱失公之表德生卒竝失無傳配端人慶州李氏公墓在元靈光今長城森溪壽延山云而失守家乘與口傳只此寥寥數語而己男希昌希武希成女梁末汀柳阡孫鯁鱗鰲鯤長房生鱣鮪鰋鰭次房出龜鰲季房出以不煩難枚悉嗚呼世代寢遠籍牒罹燹無由考徵者多後承之齎恨幾何主 連山洞壽澤詢謀宗中設壇于芍藥洞考墓下靑龍嶝歲薦芬苾以寓追遠之慕可見孝思之深而優爲先墓諸家之模楷矣曷不休哉撮其事實鐫諸石陰使後百世知其爲通仕郞沈公之祀壇

大韓民國六十六年甲子春正月
安城守 烏川 鄭知海 謹識


8세조 통사랑심공 휘 근(瑾) 사단음기
선조의 무덤이 있으면 나무를 심고 시제를 지내야 하나 수호를 잘 못하고 兵火를 여러 번 겪어 묘소가 실전되어 歲一祭를 지내지 못하고 단(壇)을 쌓아 제사지내는 것은 공자의 바라보고 제사지내는 가르침을 본받는 것이니 이는 仁人 효자가 용모를 올바르게 고쳐도 따를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여러 자손이 종중의 의논을 모아 새로 비석을 세우려고 멀리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나를 찾아왔는데 그 15代孫 相錄이 또한 貴하도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예교(禮敎)의 끈이 풀어지고 원래의 儀式은 잊은지 오래되어 한탄스러우며 덕망이 높은 집안이 조상의 덕을 추모함에 힘쓰고 힘써 후한데 돌아감이 이와 같으니 감히 글을 못한다고 범연히 보아 넘길 수 없어 되풀이하여 말하노니 묘소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禮의 正道요 단소(壇所)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禮의 權道이니 무엇을 상심하리오. 이에 살펴보건대 沈氏는 본관이 靑松이요 고려말에 문림랑 휘 홍부(洪孚)가 시조요 전하여 내려와 휘 덕부(德符)는 李太祖를 도와 공훈으로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定安이니 이 분이 공의 고조요 이 분이 휘 계년(繼年)을 낳으니 고려조에 지성주사(知成州事)였고 이태조가 등극하여 여러 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진원산(珍原山)의 산속에 숨어 의리를 잡고 절개를 지켰으며 자호(自號)가 둔재(遁齋)요 장성 양계사(良溪祠)에 配享되었으니 이 분이 증조이고 또 전하여 휘 연(涓)은 호가 애암(愛菴)이요 조선조 太宗 12年 甲午에 문과급제하여 사헌부감찰 전중어사(殿中御史)였고 이듬해 乙未에 卒하니 丙申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양계사에 같이 배향되었으며 이 분이 휘 종하(宗夏)를 낳으니 충순위 좌승지(忠順衛 左承旨)로 공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계통과 본관을 모두 잃었고 공의 덕행과 善行 生卒年月日은 모두 잃어 전함이 없으며 배위는 端人경주이씨이다. 공의 묘가 원영광(元靈光) 지금의 장성 삼계 수연산(長城 森溪 壽延山)에 있다고 하나 수호함을 잃고 가승과 구전으로 다만 이 쓸쓸한 두어 마디 말만 전할 뿐이다.
아들은 희창, 희무, 희성(希昌, 希武, 希成)이요 사위는 양말정(梁末汀), 유천(柳阡)이요 손자에 경, 인, 오, 곤(鯁, 鱗, 鰲, 鯤)은, 장방(長房)의 소생이요 전, 유, 언, 기(鱣, 鮪, 鰋, 鰭)는 차방(次房)의 소생이며 구, 별(龜, 鱉)은 계방(季房)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번거로워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아 세대가 멀어지고 문서가 병란에 없어져 고징(考徵)할 수 없는지 오래 되었으니 후손들의 탄식함이 어떠하겠는가. 종손인 連山洞의 壽澤이 종중과 의론하여 작약동 아버지의 묘 아래 청룡등(靑龍嶝)에 설단하여 시제를 지내고 조상의 덕을 사모하게 되어 효도 생각이 깊고 넉넉하며 諸家의 모범이 됨을 볼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그 사실을 모아 비석 뒤에 새겨 백세의 뒤에도 통사랑 심공의 사단(祀壇)임을 알게 하노라

      대한민국 66년 갑자년 봄 정월   일에
안성수 오천 정지해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