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세정공(휘 선)묘표

경기관찰사 망세정공 휘 선 묘소
소재지:경기도 남양주시 오남면 양지리

묘 표 석


망세정공 배위 초계정씨 묘소
소재지:경기도 남양주시 오남면 양지리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면 양지리

贈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使行嘉善大夫京畿道觀察使諱璿墓表
公諱璿靑城伯德符之曾孫也以戚里之賢早年登仕爲守令爲判官陞戶曹叅議按察黃海京畿兩道晩年卜築別墅于楊州豊壤縣構亭扁以忘世率其五子往來優遊諸子皆解雅歌使之節奏和樂年未六十而終時人惜之葬于亭之後山旣葬之後神道無碑年紀已久塋域漸夷將恐無傳是斵短碣略叙係派昭示千億孤竹淸風柴桑明月有山巍巍有水汨汨慶流後裔茂膺遐福前考後妣公生五男長曰安仁武科兵使 贈叅判 次曰安義靑城尉 次曰安禮郡守 次曰安智進士牧使 贈兵叅 次曰安信奉事兵使娶坡平尹氏 我太宗大王女淑順翁主坡原尉尹킎之女靑城娶配我 世宗大王女貞安翁主

曾孫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
光彦記陰幷書篆 嘉靖癸亥秋建我朝明宗十八年


증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행가선대부경기도관찰사휘선묘표(번역문)
공(公)의 휘는 선(璿)이요,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증손이다. 왕실(王室)의 외척(外戚) 어진 선비로 일찍이 벼슬에 올라 지방(地方)의 수령(守令)과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호조참의(戶曹叅議)와 황해도 및 경기도 관찰사(觀察使)에 올랐다.
만년(晩年)에 경기도 양주 풍양 언덕에 별장(別莊)을 짓고 이름하여 망세정(忘世亭)이라 하였다.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정자를 왕래(往來)하며 금서(琴書)를 즐기며 생애(生涯)를 보내다가 육십(60)이 못되어 세상(世上)을 마치니 사람마다 애석(哀惜)하게 여겼다.
정자 뒷산에 장례(葬禮)는 모셨으나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이 오랜 세월(歲月)이 지나면 묘역(墓域)이 점점 헐어 장차 전(傳)하지 못할까 두려워 자그마한 비석을 세워 그 내력(來歷)을 간략(簡略)하게 새겨서 오래도록 볼 수 있게 하노니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도연명(陶淵明)처럼 유풍여운(遺風餘韻)이 산(山)처럼 높고 물처럼 흘러 후예(後裔)들은 오래도록 번창하리라. 아버지와 어머니 묘(墓)를 위 아래로 모셨으며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큰 아드님은 이름이 안인(安仁)으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병조참판(兵曹叅判)으로 증직되었고, 둘째 분은 안의(安義)로 청성위(靑城尉)이며, 셋째 분은 안례(安禮)로 군수(郡守)를 역임하셨다. 넷째 분은 안지(安智)인데 진사(進士)로 목사(牧使)를 지내고 병조참의(兵曹叅議)로 증직되셨고, 다섯째 분은 안신(安信)이며 봉사(奉事)와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숙순옹주(淑順翁主)의 부군(夫君) 파원위(坡原尉) 윤평(尹킎)의 딸이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는 세종대왕의 부마(駙馬)로서 정안옹주(貞安翁主)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증손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광언이 음기와 전서를 쓰고
서기 1563년 가정계해 추(西紀1563年 嘉靖癸亥秋)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