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참의(휘 린)행장

병조참의공 휘 린 묘소
소재지: 양주 송산면 시북곡 분토동

묘표석


七世祖通政大夫兵曹參議諱潾宣德癸丑生弘治庚戌二月二十二日卒享年五十八夫人慶州李氏父諱孝林大護軍祖諱携漢城尹曾祖諱誠中外祖奉敎茂松尹自堅忌四月十七日墓在楊州外松山柴北谷上下墳艮坐巽得酉破有床石石人香明臺墳形馬鬣
兵亂之後公墓及贊成墓失其所傳府使挺彙氏聘於松山柳家柳知洞內流傳語故始乃尋得則公碣石無之而來脈五十步內有崔姓人逼葬之塚碣石之無蓋是逼葬人慮之計其時拘於尋得時紹介人顔情未卽탢得而墓道無表懿蹟無傳可勝痛哉
后夫人李氏淸州望族曾祖諱居易議政府領議政祖諱伯臣蔚山僉節制使考諱佶宗親府典籤司錄事쯼南原梁氏金海府使諱思貴之女夫人宣德乙卯五月十六日生兵曹參議沈潾之繼室琴瑟之和三十有二年弘治庚戌參議公先逝夫人執喪盡禮撫愛諸孫如己出焉吾先君進士諱幹參議公長孫而得育於襁褓而甲子先大人而夭夫人哀念痛毒血泣成疾幾絶而蘇余生三日慈母見背夫人憐其惸獨懷抱鞠養以就成長子苓亦及見養恤愛偏篤嘗謂此兒必復門戶早捷文科今爲司諫院正言其鑑類此夫人天性貞正果敢動循法禮爲人家婦益虔先祀家道肅整戚族和睦能通經史又解釋書史聖賢可法之謨爲子孫取則之規慈仁孝禮一出於誠聞者莫不敬歎正德辛巳八月初二日遭疾以卒享年八十七無后哀哉參議公與前夫人葬在楊州松山里傍無可卜之兆不得同窆于彼而是年十月葬于坡州灰谷里艮坐坤向之原夫人之舅父靑松府院君恭肅公墓東也

嘉靖二十四年乙巳八月 日
曾孫通訓大夫行平丘道察訪 沈宗元 謹識


7세조 통정대부 병조참의공 휘 린(潾) 행장
7世祖는 음직(蔭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신 휘(諱)는 린(潾)인바 선덕계축(宣德癸丑) 세종 15年(1433)에 出生하시고 홍치 경술(弘治 庚戌) 성종(成宗) 21年(1490)에 別世하시니 향년(享年) 58歲이다. 夫人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인데 父親의 휘는 효림(孝林)이며 관직은 대호군(大護軍)이고, 祖父의 휘는 휴(携)니 한성윤(漢城尹)이시고, 증조(曾祖)의 휘는 성중(誠中)이시며, 외조(外祖)는 관직(官職)이 봉교(奉敎)요, 관향(貫鄕)이 무송(茂松)이며, 姓名은 윤자견(尹自堅)이시다. 부인의 기일(忌日)은 4月17日이며 묘소는 양주군 외송산시북곡(外松山柴北谷)에 계신바 양위분(兩位分) 상하분(上下墳)으로 간좌(艮坐)이시며, 상석 석인(床石 石人) 망주석(望柱石) 향명대(香明臺)가 있고 분형(墳形)은 말갈기형이다.
병난 후(兵難後)에 공의 묘소와 그 아들 찬성공묘(贊成公墓)를 실전(失傳)했더니 부사 정휘(府使挺彙)씨가 송산 유씨가(松山柳氏家)에 장가를 들어 유씨가(柳氏家)에서 동내류전어(洞內流傳語)를 듣고 비로소 묘(墓)를 찾았으나 공묘(公墓)의 갈석(碣石)은 없어지고 50보 근처에 최씨(崔氏)의 암장묘(暗葬墓)가 있었으니 공묘의 갈석(碣石)이 없어진 것은 최씨 所行인 듯 하며 묘를 찾을 때 소개인(紹介人)이 사실전부(事實全部)를 실토(實吐)하지 않아 묘도(墓道)의 石物도 없어지고 의적(懿蹟:事蹟)도 전하지 못하니 애통(哀痛)함을 금(禁)하지 못하겠다.
후부인(后夫人)은 李氏인데 청주망족(淸州望族:有名族)이신바 증조의 휘는 거이(居易)요, 관직은 영의정이시고 조부의 휘는 백신(伯臣)이요, 관직은 울산첨절제사(蔚山僉節制使)이다. 고(考:父)의 휘는 길(佶)이며, 종친부전첨사록사(宗親府典籤使錄事)이시며 비(妣母)는 남원 양씨(南原梁氏)이신바 김해부사(金海府使) 사귀(思貴)의 따님이시다. 后夫人은 선덕 을묘(宣德 乙卯:1435) 5月 16日에 출생하시고 병조참의(兵曹參議) 휘 린(潾)의 계실(繼室)이 되어 32年 간을 금슬(琴瑟)좋게 동거(同居)하시다가 홍치 경술(弘治 庚戌)년에 참의공(參議公)이 후부인 보다 먼저 서거(逝去)하셨는데 이 때 후부인께서 초상(初喪)을 치르시되 예(禮)를 다하시고 제손(諸孫)을 무애(撫愛) 하시기를 친소생(親所生) 같이 하셨다. 나의 아버지이신 進士公 휘 간(幹)은 참의공(參議公)의 長孫으로서 강보(襁褓)에 쌓여 자라셨으며 甲子년에 휘 간(幹)이 그 아버지보다 먼저 별세하시니 후부인 이씨께서 슬픔이 지나쳐 피눈물이 나고 기절(氣絶)했다가 소생(蘇生)하였다. 나 종원(宗元)도 출생 3日만에 어머니가 별세하셨는데 그 때도 후부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몸에 품고 기르셨으며 나의 아들 영(쫢)도 또한 후부인의 양휼(養恤)을 받았는데 이 아이가 문호(門戶)를 회복(回復)하여 빛낼 것이라 하더니 일찍 文科에 及第하여 지금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으니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이와 같도다. 후부인은 천성(天性)이 정직하고 과감하여 행동이 예법(禮法)을 따르시고 시집오셔서 선대제례(先代祭禮)를 지성으로 받들고 家道가 숙정(肅正)하니 척족(戚族)이 화목하며 경사(經史)에 능통(能通)하시었다. 또 서사(書史)도 해석할 수 있었으며 성현(聖賢)의 본받을 法과 자손을 위하는 규범(規範) 그리고 자인효예(慈仁孝禮)가 한결같이 성의(誠意)에서 나왔기로 듣는 자가 모두 칭찬하였다.
정덕 신사(正德 辛巳:1521)년 8月 初2日에 질환(疾患)으로 별세하니 향년이 87歲요, 무후(無后)하니 애통(哀痛)하도다. 참의공(參議公)과 前夫人 묘는 양주 송산리(楊州松山里)에 계시다. 근방(近方)에 장례 할만한 묘지가 없어서 합폄(合킋)을 하지 못하고, 이 해 10月에 파주 회곡리(灰谷里)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시아버지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공숙공(恭肅公) 묘(墓) 동쪽에 장례(葬禮)하였다.

가정(嘉靖) 24年 을사(乙巳:1545)년 8月  日에
      손 통훈대부 行 평구도찰방 심종원(沈宗元)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