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공(휘 결)사적 |
정이공 휘 결 묘소 묘 표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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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산 69 |
정이공(靖夷公)의 휘(諱)는 결(決)이요 字는 통지(通之)이며 시호(諡號)는 靖夷이시니 서기1419年(世宗:己亥)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태어나셨다. 정이공은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우인데, 아버지 안효공께서 자진(自盡)하신 후로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世祖 실록에 보면 『형 심준(沈濬)과 아우 심결(沈決)과 더불어 자기의 의지(意志)를 굽히고 학문에 뜻을 두며 겸손하고 공순하여 법도에 맞으니, 文宗이 즉위해서는 벼슬길에 등용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심준은 이미 죽었고 다만 심회(沈澮) 심결(沈決) 만이 생존해 있으니 임금이 발탁하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삼았다. 임금의 특별한 대우가 매우 융숭해져서 매양 대궐안에서 그를 숙부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정이공(靖夷公)께서 집안에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두고 사헌부에서 누차 벌주기를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셨다. 사헌부에서 다시 벌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헌부의 관리를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으니, 공을 생각하는 임금의 극진한 마음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비로소 서기1451年(文宗1年) 문종이 즉위하시자 아버지 안효공의 무고한
죄가 신원(伸冤)되시고 모든 관작이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를 安孝라 내리고 형 공숙공(兄 恭肅公)과 같이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從6品)에 제수되었으며 世祖1年(1455:乙亥)에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使:從4品)에 승진되시고 세조2년(1456:丙子)에 당상관 통정대부(通政大夫:正3品)로 승진되시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셨다. 세조3년(1457:丁丑)에 가선대부(嘉善大夫:從2品)로 올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승진되셨다. 세조5년(1459:己卯)에 가선대부 인순부윤(嘉善大夫仁順府尹)으로 전직되셨다. 세조6년(1460:庚辰)에 정헌대부(正憲大夫:正2品)로 승급되시고 세조七년(1461:辛巳)에 숭정대부(崇政大夫:從1品) 지중추원사(知中樞府事)로 승진되셨다. 세조9년(1463:癸未)에 숭록대부 공조판서(崇祿大夫 工曹判書:從1品)가 되셨다. 세조12년(1466년:丙戌)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전직되시고 예종1년(睿宗 1469:己亥)에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輔國崇祿大夫 領中樞院事:正1品)로 승진되시고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셨다. 성종1년(1470:庚寅)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판돈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 判敦寧府事:正1品)로 전직되시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해 8月에 서거하시니 향년이 55세이시다.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沈決께서 卒하시니 임금이 조회(朝會)를 거두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셨다. 시호를 정이(靖夷:恭己鮮言曰靖, 安心好靜曰夷)라고 하니 자기 몸을 공손하게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夷)라 한다. 정이공의 사람됨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용모와 예의가 단정하셨다 라고 하였다. 公의 墓는 龍仁市 三東面 魚肥洞 吐雲谷 子坐이시고 배위(配位)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합장(合葬)이시다. 公의 아드님은 한분으로 휘가 정원(貞源)이시고 벼슬이 통정대부 전라좌수사(通政大夫 全羅左水使)이시다.
어명을 받고 사후(射侯:활쏘는것) 시 두 수를 지음 神武定禍亂 聖人濟艱難 願享南山壽 萬葉令民間 (신무정화란 성인제간난 원향남산수 만엽영민간) 세종대왕께서는 화란(禍亂)을 平定하시고 세조대왕께서는 가난을 구제하셨으니 원컨대 남산같이 큰 수를 누리시와 만세토록 백성을 편안케 하옵소서 聖君撫東方 庶類自生成 日暖草木暢 飽得乾坤寧 小臣曾無學 贊揚殊未精 (성군무동방 서류자생성 일난초목창 포득건곤녕 소신증무학 찬양수미정) 성군이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시니 백성들이 스스로 자라서 성공합니다. 날이 따뜻해지니 초목이 무성해지고 배불리 먹고 사니 천지가 태평합니다. 소신은 일찍이 배움이 없어 임금의 덕 찬양하기를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