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공(휘 효상)행장 |
석촌공 효상 지단 |
公姓沈氏諱孝尙號石村靑松人上祖諱洪孚 麗朝文林郞衛尉寺丞生諱淵閤門祗侯退老于山陰石畓村至今有退老亭遺墟生諱龍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元符典理判書 麗季與姑叔閔農隱入杜門洞殉節生諱天潤令同正我 太宗大王特奬忠孝拜官旌門寔公皇考也噫世級旣降文獻無徵公之生卒官爵德行事功有未得聞其詳非但其後承之所深恨抑亦爲後生之所切嗟者也然按其家乘世錄考諸邑誌野史其曰公以親老乞歸養翌年丁憂公之誠孝所格可知矣送弟晩愚公還居靑松有白首看雲之句公之友愛益篤可知矣自少志學老而不倦位極淸要而心自謙遜公之德學俱邁可知矣居家不治産業經史自娛公之安貧好道可知矣在官不務苛察而只存大體公之化民成俗可知矣嘗著冠帶枕衾四銘以自警敕益倣康節邵翁冠簪紳帶之制司馬溫公警枕布衾銘之義也有一子太山司果司果有二子長遜 顯陵參奉次洪嗚呼內外曾玄之數指不勝屈而鴻彦代作名流間出遂爲嶺以南巨族何莫非公之德之行之餘蔭耶故曰公忠孝傳家之祖學業繼世之孫今其後孫能沂十舍重跰抱遺文而來要余狀德自顧庸陋何足以執是役而惟托名是榮玆檃栝於家狀而撰次如右庸備秉筆者之揚扢焉
上之三十六年己亥五月下澣 6세조 석촌공 휘 효상(孝尙) 행장 공의 성은 심씨요 휘는 효상(孝尙)이며 號는 석촌(石村)이고 靑松人이다. 上祖의 휘는 홍부(洪孚)로 고려조의 文林郞 위위시승(衛尉寺丞)이요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로 老年에 산음석답촌(山陰石畓村)으로 退去하여 지금까지 退老亭 유허(遺墟)가 있다. 휘 용(龍)을 낳으니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요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전리판서(典理判書)로 고려 말에 고숙(姑叔) 민농은(閔農隱)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키어 죽었고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令同正으로 우리 太宗大王이 특별히 충효를 칭찬하여 벼슬을 주고 정문(旌門)을 내렸으니 이 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아아 대대로 내려오면서 문헌(文獻)을 징험(徵驗)할 수 없어 공의 生卒과 관작(官爵) 德行 사공(事功)의 자상한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후손의 깊이 한탄할 바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후생(後生)의 간절한 슬픔이다. 그러나 그 가승(家乘) 세록(世錄)을 살피고 모든 읍지(邑誌)와 야사(野史)를 상고하여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공은 부모가 늙음에 고향에 돌아가 봉양하다가 이듬해에 상(喪)을 당하였으니 공의 효성(孝誠)을 알 수 있으며 공의 아우 만우공(晩愚公)이 청송으로 돌아가 살게됨을 전송(餞送)할적에 백수간운(白首看雲)의 글귀가 있었으니 공의 우애가 더욱 두터웠음을 알 수 있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높은 관직(官職)에 있어도 마음이 스스로 겸손하였으니 공의 덕행과 학문이 높았음을 알 수 있고 집에 있을적에 재산을 불리려고 하지 않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스스로 즐겨 읽었으니 공이 가난하여도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며 도를 좋아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가혹한 사찰(査察)에 힘쓰지 않고 다만 대체(大體)를 살폈으니 공의 백성을 교화하여 좋은 풍속을 이룬 것을 알 수 있고 일찍이 관(官) 대(帶) 침(枕) 금(衾)의 사명(四銘)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소강절(邵康節)선생의 문관으로서의 의식(儀式)제도와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잠을 잘 때에도 경계한 의를 본받은 것이다. 아들 하나 태산(太山)을 두었으니 벼슬이 사과(司果)요 사과가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손(遜)은 현릉참봉(顯陵參奉)이었고 2남은 홍(洪)이다. 아아 내외 증손 현손은 다 세일 수 없고 큰 선비가 대대로 나오고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간간이 나와 드디어 영남(嶺南)의 거족(巨族)이 된 것이 어찌 공의 德行의 덕택이 아니리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공은 충효를 집에 전한 할아버지요 학업(學業)을 이어받은 손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후손 능기(能沂)가 3백리길을 유문(遺文)을 가지고 달려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 달라고 하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용렬한 사람이 어찌 족히 이 일을 맡으리오마는 오직 부탁하는 명분을 영광으로 여겨 가장(家狀)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위와 같이 지었으나 어찌 붓을 잡은 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고 하리오.
고종 36년 기해 5월 하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