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추공(휘 준)

영중추공 휘 준 묘소
소재지: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구 표 석

영중추공 배위 묘소

신 묘 표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公의 휘(諱)는 준(濬)이요 字는 심부(深夫)이고 安孝公(휘 溫)의 장남이다.
출생 년대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명확히 알길은 없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 太祖4年(1395) 9月28日에 안효공께서 20세때에 양주사제(楊州私第)에서 출생하였고 그후 강대민공(姜戴愍公:諱 碩德) 配位께서 두번째로 출생하시었으며 세번째로 동돈녕공(同敦寧公:諱 盧物載)의 배위 다음으로 네번째로 公께서 출생하였다.
그 다음으로 세분의 매(妹)씨가 출생하였으며 安孝公께서 피화를 당하신 太宗 무술년(戊戌年:1418)에 공숙공(恭肅公)께서 출생하였으며 정이공(靖夷公)께서는 유복자(遺腹子)로 1419년에 출생하신 기록으로 보아 1405년 내지 1409년사이에 출생하신 것으로 추정되며 世宗30年 무진(戊辰:1448)에 下世하신 기록이 상고(詳考)할때 公께서는 40세 전후에 별세하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文宗元年(1451) 8月6日 신미(辛未)일조의 기록에 「沈澮, 沈決은 모두 처음으로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로 제수(除授)하고 심미(沈湄)는 전농직장(典農直長)을 임명하였다.
심회(沈澮)와 심결(沈決)은 심온(沈溫)의 아들이고 심미(沈湄)는 沈溫의 맏아들 沈濬의 아들인데 심준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沈湄에게 제수한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확인하였고 공숙공과 정이공께서도 어느 후손기록에 동태생이라고 되어 있으나 「成宗元年 8月 신해(辛亥)일조에 즉6六日에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使) 沈決이 卒하였다. 때에 연세가 52세였으며 정이(靖夷)의 시호를 내렸다」라는 기록을 상고(詳考)하면 공숙공과 동태생은 아니시고 정이공께서는 공숙공보다 1세가 적은 것으로 보아 유복자였음이 확인되었다.
영중추공의 행적에 대하여는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고 우석대학교(友石大學校) 사학과 교수(史學科敎授)를 역임한 문학박사 이상옥(李相玉)의 『한국역사』에서 살펴보면 영중추공께서는 양주땅 왕십리(지금의 서울 왕십리)에서 거주하시다가 말년에는 남대문 밖에서 기거하신 것으로 보이며 또 문장 한 구절에 보면 「…이때 사대부(士大夫)들 중에 부자(富者)가 많아 호탕하게 노는 것이 유행이었다. 류방효(柳方孝) 심준(沈濬) 윤복(尹福)등도 남대문 밖에 살면서 모두 집이 은부(殷富)하여 각각 자기집에 노래하는 기생을 두고 손님을 맞아 항상 장취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삼노(三老)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公의 전후좌우상황(前後左右 狀況)을 살피건대 집에 기생을 드릴 입장은 아닐 것이나 소년기에 무술년 피화(戊戌年被禍)로 어버이(安孝公)를 잃고 상심(喪心)속에 고립무의(孤立無依)의 처지에서 성장하였으며 성장후에도 역시 관로미개(官路未開)로 거취를 定하지 못한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세월을 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公은 끝내 득관(得冠)치 못한채 生을 마치셨으며 下世한지 三年후에야 門中이 개문(開門)되었으니 이또한 애석한 일이다.
묘전(墓前)에는 표석(表石)이 있는데 공사중 발굴되어 나온 초비(初碑)에는 삼척단비(三尺短碑)에 「靑松沈濬之墓」라고만 각자(刻字)되어 있었으며 개수(改竪)한 표석(表石)에는 「朝鮮國領中樞府事 靑松沈公濬之墓」라고 되어있고 기축보(己丑譜:1649년 간행)에도 영중추(領中樞)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公이 몰(沒)한지 오랜후에 증직(贈職)이 나려 표석을 개수(改竪)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公께서는 太宗大王의 처남인 여흥 민무휼(驪興閔無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男을 낳으니 長은 동중추 미(同中樞 湄)요 次는 한성판관 치(漢城判官 淄)이다.
公의 묘소는 安孝公묘소의 東北方 면의동(勔義洞: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의실)에 上妣下考로 壬坐原이며 配位는 亥坐原이다.
묘비에는 관직과 휘만 있고 행적의 기록이 없어 公의 사적을 전혀 알길이 없으니 애재(哀哉)라. 後孫들은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