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익공 송덕비문

인수부윤공종회에서 양혜공묘소수호에 공을 기리는 송덕비


公의 諱는 鍾益이요 字는 文佐이며, 本貫은 靑松人이다.
始祖 洪孚는 高麗文林郞衛尉寺丞이요. 閤門祗侯에 諱淵이시고, 吏曹正郞 封靑華府院君에 諱龍이시며, 朝鮮朝開國元勳이신 諱德符左政丞은 靑城伯을 封하시고 仁壽府尹에 諱澄은 派始祖이시다.
贈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 諱璿은 京畿 黃海 兩道의 監司를 지내시고 端宗遜位때 棄官 歸鄕하신後 朝廷에서 여러차례 불렀으나 誓死不變 志節로 나가지 아니하시니 그 高潔하신 忠節을 높이 評價하여 士林에서는 龜巖祠에 뫼시어 每年 奉享하고 丙子諸賢錄에 依하면 莊陵火巢內 節義를 崇仰하는 丙子 各設諸臣壇에 忘世亭公께서 뫼셔져 계시니 이분이 公의 16代祖이시다. 慶尙右道 兵馬節度使諱安仁은 15代祖이시며 安城郡守公諱濱 贈吏曹判書는 14代祖이시고 左叅贊諱光彦은 公의 13代祖이시다.
朝廷에서 文武를 兼備하였다 하여 크게 期待되었던 贈吏曹判書諱錦果川縣監公은 12代祖이시고 領議政諱之源은 公의 9代祖이시며 憲宗 哲宗朝에 吏曹叅判을 歷任하신 諱敦永이 公의 高祖이시니 모두 直系顯祖이시다. 顯官이신 贈戶曹判書諡良惠諱石雋은 仁壽府尹公의 長子요, 公의 17代祖이신데 龍仁市浦谷面稼室里 白蓮菴下東幕谷 壬坐原名堂에 葬封되신後 後孫들이 億兆萬年을 받들기를 다짐하고 뫼셔진 聖域이다.
後孫들이 모두 先祖님들의 後光으로 代代로 名聲이 드높고 顯官이 繼續되니 果是三韓甲族의 沈門이다.
그러한 우리 門中에 뜻하지 않은 不詳事가 닥치니 顯祖이신 良惠公墓域 134町55坪中 80餘町步를 一部 宗人이 理性을 잃고 中央開發(現 龍仁애버랜드)에 賣却하였다. 참으로 痛歎할 일이다. 鍾益公께서 이를 되찾으려고 中央開發을 相對로 原因無效返還請求訴訟을 提訴키 爲하여 法律的인 檢討를 하였으나 이미 法的으로는 返還不能이라는 判斷으로 안타깝게도 不得已 抛棄해야 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哀惜하고 悲痛한 일이로다. 殘餘 54町55坪도 또 愚昧한 몇몇 宗人이 墓下慰樂施設인 中央開發에 亦是 賣却하려고 宗人들을 相對로 署名 捺印中 本宗會 初代會長이시며 顧問이신 公께서 大怒하시며 그 主動者들을 크게 꾸짖어 卽時 中止시키고 明求會長께서는 이들로 부터 同意書를 押收하여 賣却陰謀를 劇的으로 防止하였다.
鍾益公과 明求會長 父子分이 아니었으면 祖上께 돌이킬 수 없는 큰 累를 끼쳤을 것이니 참으로 不幸中 多幸한 일이다.
그러나 일이 이에서 끝나지 않고 中央開發에서는 1973年 12月 良惠公의 墓域 全地域을 山林開發法을 惡用하여 特殊開發地域 및 經營權者指定申請書를 京畿道知事 經由 山林廳長에 提出하여 京畿道와 山林廳의 關係官이 現地調査를 完了하고 檢討中에 있어 또다시 良惠公墓域이 受難을 겪게 되는 큰 難關에 逢着하게 되었다. 公께서는 明求會長과 直時 熟議하여 그 對策을 講究하시니 本是爲先事業에 率先하시고 獻身的이신 鍾益公과 明求 會長께서는 6世祖이신 良惠公墓域을 무슨 일이 있어도 期必코 守護奉獻해야 한다는 使命感으로 大統領 및 山林廳 其他 關係機關에 여러차례 陳情書를 提出하고 隨時로 訪問하는등 모든 努力을 傾注함은 勿論이고 1974年부터 稼室里 山15番地 21町82坪 및 同山 17番地 32町73坪 都合 54町55坪에 밤나무 및 니기다 落葉松等 有實樹 및 用材林의 造林 計劃을 樹立 7回에 걸쳐 山林廳에 自力 造林 申請書를 提出하여 長期間에 걸친 鬪爭과 刻苦의 努力끝에 드디어 1978年 12月 11日 明求會長 責任下에 1979年 末까지 自力造林한다는 覺書를 提出해 달라는 山林廳長의 通知와 함께 中央開發의 特殊開發 申請을 返戾케 하는데 成功하여 1978年 12月 20日 龍仁郡守로 부터 自力開發 承諾이 許可되었다. 참으로 10餘年의 오랜 歲月 모든 手段과 方法을 動員하여 얻어낸 快擧이다.
宗會는 卽時 理事會를 開催하여 造林에 所要되는 財源을 調達키 爲하여 株式을 發行키로 하는 等 諸般方案이 提起되었으나 所期의 成果를 거두지 못하여 失意에 빠지게 되었다.
崇祖敦族精神이 남다르신 鍾益, 明求 父子分께서는 卽時 斷案을 내려 1979年 當時 參阡萬원의 巨金을 單獨出捐하여 前記造林計劃書대로 밤나무 니기다 落葉松等 自力造林事業의 役事를 無事히 끝내어 良惠公墓域을 守護케 하였으니 全宗人의 뜻을 모아 衷心으로 感謝할 따름이다.
歲月이 흘러서 至今의 울창한 墓域을 볼때 今昔之感이 새로우며 鍾益公과 明求 父子分의 獻身的인 崇祖精神이 먼 훗날까지 後孫들에게 길이 기억될 것이다.
또한 公께서는 그 外에도 몇가지 큰 業績을 남기셨으니 우리 靑松沈門의 役事인 大同世譜刊行(戊戌譜)을 爲하여 1958年부터 1972年까지 無慮 14年餘에 걸쳐 渾身의 努力을 傾注하시어 그 莫重한 일을 單獨 出資하여 기여코 達成하시니 우리 沈門歷史의 한 章에 큰 足跡을 남기시었다.
1978年 10月부터 翌年 4月까지 서울 松坡區 巨餘洞 世葬地에 모셨던 兵使公諱安仁等66位의 先祖任들을 萬不得已 忘世亭公 墓域으로 遷葬을 뫼시는 일과 位土를 마련하는 일 等 大役事에 많은 私財를 投入하여 順調롭게 끝내는데 盡力하셨으며, 그外 重要宗中 大小事의 勞心 焦思하신 일들을 이에 全部 詳述치 못함은 悚懼스럽고 아쉬운 일이다.
公은 1899年 己亥 7月9九日 父親 遠穆公과 母親 光山金氏 사이에 2男으로 誕生하시어 性品이 溫柔하고 心德이 높으시며 禮節이 올바르셔 萬人의 標上이시었다.
12歲에 仁陵叅奉 俊稙의 2女 韓山李戊生女史와 婚姻하여 1男 鳳求는 (株)鮮光開發의 會長이요 2男 明求는 靑松沈氏大宗會長이며 庚辰 大同世譜를 刊行하는 等 큰 業績을 남기신, (株)鮮光會長이시다. 3男 暎求는 財務部 稅關長이며 四男 昞求 敎授는 國立 서울大學校 商科大學長으로서 우리나라의 많은 人材와 後學을 輩出하였고, 5男 晶求는 國立 서울大學校 商科大學을 卒業하고 仁川에서 國會議員에 當選되어 本人의 榮光은 勿論이고 靑松沈門을 빛낸 四選 國會議員으로서 國會豫算決算委員長等 要職을 두루 거친 나라에 크게 貢獻한 人物이다.
子孫들이 모두 出重하고 國家와 社會에 크게 이바지하며 兄弟間 友愛하고 和氣滿堂한 家系를 이어가는 우리 社會의 代表的인 多福한 家門이다.
아마도 爲先에 精誠을 다하는 이분들께 祖上님께서 施惠하시는 餘慶이리라.
또한 公께서는 평소 當代의 名士들이 會同하는 서울 鍾路區 公平洞에서 자주 어울리시며 世情을 論하고 交流도 하시는 忙中閑의 餘暇도 가지시었다.
公께서는 恒時 祖上의 遺志를 이어받어 崇祖 敦族 敬天 愛人 務實力行을 家訓으로 五兄弟에 訓하시며 子孫의 榮達을 지켜보시고 多福하게 지내시다 1979年 乙酉 四月 27日에 서울 北阿峴洞 自宅에서 逝去하시니 宗人들은 모두 哀痛하여 슬픔을 禁치 못하고 永遠하게 不朽하여 後孫의 覺銘이 오래 기억되기를 靈前에 드리옵고 敬拜하나이다.
西紀 2002年 壬午 3月  日
傍孫 仁壽府尹公派 總務 載冕 謹撰
傍孫 禹植 謹書
仁壽府尹公派 宗會長 晶求, 副會長 永求, 聖植 謹 竪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