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암공 (휘 연)사적 |
애암공 휘 연 묘소 소재지:광주광역시 광산구 감정동 가정산 묘 표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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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비 |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감정동 가정산 |
애암공의 휘는 연(涓)이요 자는 성철(成綴)이며 애암은 호인바 지성주사공(知成州事公)의 아들로 1392年(태조1)에 개경 청문방(靑門坊)에서 출생하다 유시(幼時)로부터 용의가 단정하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총민함이 뛰어나 五歲적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효도는 마땅히 정성을 다 함에 있고 충성은 신명을 나라에 바침에 있다』는 구절을 읽고 묻기를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충효의 도를 진실로 알고 충효를 행한 분일까요?』 사람이 충효치 못한 즉 금수(禽獸)와 같으다 하며 그로부터 부모의 마음과 거처를 편안히 해드리고저 노력하니 이웃에서 모두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하루는 『애군희도(愛君希道)하고 태우국(泰憂國)하며 원년풍(願年豊)』이란 구절을 외울제 6歲兒의 송재(誦才)가 신통하기로 이웃 선비가 묻기를 『주자시(朱子詩)를 배우고 있느냐』 물으니 『아직 배우지 않았으나 금관(金冠) 쓴 백의노인(白衣老人)이 죽간(竹簡)을 들고 엄연한 자세로 이 시를 말씀하시면서 이 시의 뜻을 잊지말라 하시기에 적어 두었다가 암송케 되었다』함에 이 말이 원근에 전달되어 명유석학(名儒碩學)들이 그 의용(儀容)이 단장하고 응대가 총민함을 보고 六歲兒의 충효사고(忠孝思考)에 감탄하며 반드시 보국지재(輔國之材)가 될 것이라 하였던 고로 속칭 보국동(輔國童)이라 하였다. 성장함에 따라 경학을 독호(篤好)하여 이미 대의(大義)를 통달하니 학문에 노성(老成)한 인사(人士)들도 난해(難解)한 바를 번번히 질의하였다. 16歲 되던 1407年 4月에 부친(父親)께서 기질(奇疾)로 수삭(數朔)을 신음(呻吟)할제 정성을 다하여 시탕(侍湯)에 전념하였으나 약석(藥石)의 효(效)가 없든중 환자가 때아닌 홍시(紅枾)를 먹고 싶다 希望할째 시계(時季)가 아니라 구지부득(求之不得)한 형편인 고로 함루(含淚)코 한탄하면서 정전(庭前)의 감나무를 쳐다본즉 녹엽(綠葉)이 바야흐로 싹트고 있는지라 감나무를 붙들고 울면서 하늘이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할려거든 가지가 말라 죽을 것이로되 하늘이 아버지를 살리시려거든 속히 열매가 열리게 하여 주기를 축원하였다. 효심이 감천하였음인지 익조(翌朝)에 여상(女商)이 『紅枾사시요』하며 나타난故로 뛰어나간본즉 과연 홍시(紅枾) 10個가 광주리에 담어져 있는지라 후가(厚價)를 주고 사서 드렸드니 부친께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汝의 효심이 감천하였으니 나의 병이 쾌차하게 되었다』하시다. 공역신기(公亦神奇)하여 『낭자(娘子)는 어디 살며 감 이름은 무엇인데 지금토록 썩지 않었느냐』 물어본즉 『나는 함경도 덕원(德源)사람으로 작추(昨秋) 九月에 음성(陰城)에서 가득(買得)한 수령시(數齡枾)라』 答하고는 인홀부견(因忽不見)하고 단지(單只) 枾木가지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는 일화가 있고 의원(醫員) 김성원(金聲遠)이 감탄하여 심연(沈涓)의 孝가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했다는 효도고사(孝道故事) 보다 못지 않으니 이는 지성이 감신(感神)함이라 하였다. 父親이 일찍이 훈계하기를 『나는 도의가 허물어져 두마음을 가진 자를 천고의 수치(羞恥)로 알고 멀리 하였으되 여(汝)는 새時代에 태어났으니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문호를 보전하는 것도 또한 도리가 될 것이다』하여 과학공부에 힘쓰게 되었으며 1408年에 太祖가 승하(昇遐)하자 등산 망곡(望哭)하고 소복으로 심상삼년(心喪3年)하야 충성심을 표현하였으며 성품이 인자하여 고과빈인(孤寡貧人)의 구혈(救恤)과 조혼부상(助婚賻喪)에 정리(情理)를 다하여 적덕(積德)에 힘써 존경을 받았으며 太宗14年(1414年)에 문과에 급제할제 태종(太宗)이 사알시(賜謁時)에 『과인이 현준지사(賢俊之士)를 구하는중 옛날 은종(殷宗)은 몽중(夢中)에 양필(良弼)을 얻고나서 인재를 얻었다 하는데 과인은 불몽이양필재목(不夢而良弼材木)을 구득하였으니 하나님의 도우심인가 하노라』 칭찬하였다.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제수되었다가 다음해에 문장의 탁월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설서(說書)로 옮겼으며 1417年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1419年에 성균관(成均館) 전부(典簿)에 승차하였고 1421年에는 홍문관(弘文館修撰)으로 옮겼다가 1422年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다음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가 1424年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世宗大王께서 어사(御使)의 책임이 막중(莫重)한 바이니 순감(詢監)하여 사현자(事賢者)는 표창하고 과오자는 제척(除斥)하라 하시니 충성을 다하여 맡은바 직무를 완수할 것을 맹서하고 중앙관서의 정사를 순찰 선처하던중 1425年(세종7) 2月9日 조정(朝廷)에서 삼각산(三角山)과 한강에 거행되는 산신제(山神祭)에 제(際)하여 7日에야 公에게 제감임무(祭監任務)가 명령되자 公은 이 처사에 불복하기를 중사(中祀)임으로 3日間의 산재(散齋)와 2日間의 치재(致齋)를 행함이 법전에 합당하거늘 7日에야 제감(祭監)을 임명함은 부당할 뿐 아니라 祭祀가 불결하게 된다고 대사헌(大司憲) 이명덕(李明德)에게 항의한 것이 끝내 상감에게 주달(奏達)되어 대사헌이하(大司憲以下) 관련 책임자 7名이 파직될 적에 沈公은 보좌의 직책에 있으면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모욕(侮辱)하였다는 죄목으로 사임되었으나 청검(淸儉)하고 강직한 성격의 沈公은 후회치 않고 귀향(歸鄕)하여 후진을 훈육타가 애석하게도 그해 연말에 급졸(急卒)하시니 향년 34였다. 후일1476年(성종7)에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증직되고 1834年(憲宗元)중 양계사(良溪祠)에 배향되어 향유(鄕儒)들로부터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이에 애암공의 감찰직 해임전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