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암공의 감찰해임전말 |
1425년(세종7) 2월27일에 사헌부 집의(執義) 송인산(宋仁山) 장령(掌令) 송기(宋箕) 양활(梁活) 지평(持平) 김자이(金自怡) 등이 사직서를 내면서 상소하기를
『신등이 본래 아무 재능도 없사온대 지나치신 성상의 은혜를 입사와 외람하게도 풍화와 법도를 맡은 직책을 받들고 잠시도 보답의 공효가 없어 오직 날로 전전긍긍 하옵던차에 감찰 허만석(許晩石)은 망령되이 죄가 없다하여 도로 나와 집무하게 하였으나 이는 실로 신등의 재능과 식견의 용렬 천박한 소치입니다. 감찰 이영간(李英幹) 전충(全衷)등이 신등의 과실을 극히 과장하여 비난하므로 신등이 글을 올려 사직하였더니 윤허하심을 얻지 못하고 사직서를 도로 내어주시고 인하여 다시 나오라 명하시므로 신등이 비록 자리에 나왔사오나 마음으로는 실상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또 사간원에서 소를 올려 신등의 죄를 청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전날 하관(下官)에게 책망을 받아 수치가 막대하온대 또 사간원의 견책을 입었으니 신등의 과실이 이와 같음에 이르고도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직임으로서 뻔뻔스럽게 공무를 집행하여 조정의 기강을 더럽게 물들인다는 것은 진실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비옵건대 신등의 관직을 파면하시와 헌사(憲司)의 직임을 바르게 하소서』하니 주상께서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옛사람이 말을 남기기를 자신에게 허물이 없을것 같으면 어찌 남의 말을 개의하랴 나는 그대들이 죄가 없다고 보니 각기 직업에 나아가는 것이 옳다』하였다. 집의 송인산(宋仁山)이 계하기를 『근일에 신등이 또 욕을 당하였습니다. 금월 7일에 지평 성염조(成念祖)가 감찰 심연(沈涓=지성주사공의 아드님이신 애암공)과 권수종(權守宗)을 초9일에 한강과 삼각산의 수신제(水神祭)와 산신제(山神祭)의 제감(祭監)으로 정하고 또 관아에 나누어 보냈더니 심연등이 감찰한 뒤에 돌아와서 본부에 보고하기를 『이번 두곳의 제사는 중사(中祀)임으로 의당 3일간의 산재(散齋)와 2일간의 치재(致齋)를 행하여야 할 것인데 비로소 초7일에야 제감을 나누어 파견하였으니 분대(分臺) 서리(書吏)를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하옵기에 본부에서 심연(沈涓)등에게 묻기를 『장무 지평 성염조(成念祖)가 비록 잘못 분대(分臺)하여 산재를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감찰들이 어찌하여 이를 고하지 않고 감찰하였느냐』하니 심연(沈涓)등이 대답하기를 『본부에서 일찍이 성상께서 친히 거동하시어 종묘제(宗廟祭)를 행할 때에도 상가에 출입한 허만석(許晩石)으로 하여금 청제감(淸祭監)을 삼아 감찰하게 하였고 이번에도 또 이와 같이 하였으니 필연 본부에서 제사에 불경하여 그런것 같다. 돼지머리가 삶아졌고 귀가 익었기 때문에 분대서리(分臺書吏)의 죄를 청하였고 또 대장(臺長)의 과실이 매우 많은데 어찌 도리어 무죄한 사람을 탄핵하느냐 이는 반드시 전일의 허만석의 일을 가지고 보복하는 것이다』하였습니다. 또 성염조(成念祖)에게 묻기를 『초9일 제사에 7일에 제감(祭監)을 낸것도 늦었는데 또 분대(分臺=감찰을 나누어 보내는 것)하였으니 어찌 그리 실수가 많았느냐』하니 성염조가 대답하기를 『본부의 공무는 대사헌(大司憲) 이하가 모두 알고 한 일인데 어찌 얼굴을 들고 공무를 집행하오리까 신등의 직임을 파하시기를 원하옵니다』하다. 세종전하께서 이르기를 『전의 일은 비록 굳이 사양하여도 듣지 않았으나 이 일에 대하여서는 내가 분별하겠다』하고 드디어 심연(沈涓) 성염조(成念祖)의 공함 답통(答通)을 들여다가 보고는 대언(代言)에게 말하기를 『내일 정사를 볼 때에 다시 아뢰어라』 하셨으니 이는 그 불공한 언사와 태도를 피차 미워하고 있음을 실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주상께서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집의 송인산(宋仁山) 장령 양활(梁活) 송기(宋箕)와 지평 김자이(金自怡) 성염조(成念祖)등이 삼각산, 한강의 제감(祭監)을 미리 정하지 않고 또 분대(分臺)하게 하여 재계(齋戒)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제향때에 작지않은 착오된 일을 즉시 탄핵하지 않은 이유와 감찰 심연 권수종은 비록 본부에서 잘못 분대한 것이나 즉시 논하여 고하지 않고 물러나 집에서 잤으며 또 본부에서 질문할 때에 잘못을 크게 드러내어 답통(答通)한 죄상등을 추구하여 보고하라』 함에 이르러 이 때문에 관련자 전원이 의금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3월2일에 의금부에서 지평 성염조(成念祖)가 장무(掌務)로서 제감(祭監)의 감찰을 늦게 임명한 죄와 감찰 심연이 재계(齋戒)를 하지 않고 제사를 감찰하고 또 사헌부에서 탄핵 심문할 때에 도리어 그 허물을 본부에 돌린 죄와 대사헌 이명덕(李明德) 송인산, 장령 송기 양활 지평 김자이 등이 즉시 장무(掌務) 성염조(成念祖)를 추핵하지 않고 늦춘 죄를 주달하게 되었다. 주상께서 비답하기를 성염조와 심연은 율문을 상고하고 송인산은 거론하지 말것이며 이명덕 송기, 양활, 김자이는 이미 직임을 파면하였으니 모두 죄를 논단하지 말라고 명령함에 따라서 그 죄률이 심연은 보좌의 직책에 있으면서 그 장관 이명덕을 모욕하였음으로 장(杖) 80에 해당하였으나 주상이 특명하여 2등을 감하고 성염조는 제사의 일시(日時)를 미리 고시하지 않은 죄로 태(苔) 40에 해당하였으나 훈신(勳臣) 성석린(成石璘)의 손자라 하여 이를 면하게 하였다. 이로서 송인산 만이 구제되었으되 좌천되고 대사헌 이하 나머지 분은 모조리 해임됨으로서 사헌부가 개편되다시피 되었다. 대종회 부회장 相得 엮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