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부윤공(휘 징)

下 인수부윤공 휘 징, 上 배위 묘소
소재지: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

묘 표 석


인수부윤공 배위 송씨 묘표석


소재지: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


五世嘉靖大夫仁壽府尹諱澄生辰卒年無傳忌四月十七日墓在全羅道高山縣雲西面密坡谷蓑笠峰壬脉子午向夫人礪山宋氏戶曹判書義蕃女生辰卒年無傳忌正月十三日墓公墓同原上下封有一子卽良惠公
墓表曰嗚呼此我十一世祖府尹沈公諱澄配礪山宋氏判書義蕃女祔葬爲上下墳者在麗季有衛尉寺丞諱洪孚肇系靑松閤門祗侯諱淵吏曹正郞諱龍靑城伯諱德符寔爲公高曾祖及考判官石雋觀察使璿節度使安仁郡守濱左叅贊光彦監察錦府使宗忱監役偰領議政之源府使益善亦公之後也世著休聞絓組相承積德餘慶於斯可徵噫公於
獻廟朝坐弟 國舅溫禍謫海南及卒葬高山密坡谷向午原生卒行蹟代逖無傳經兵燹久失墓所矣後孫廷老守德恩得信書改封立石以識之時肅宗庚寅也
碑畧曰仁壽府尹沈公靑松人諱澄麗季有諱洪孚衛尉寺丞是公高祖也曾大父諱淵閤門祗侯大父諱龍典理正郞 贈靑華府院君考諱德符入我 朝勳封開國位左議政靑城伯我 太宗在東宮設府仁壽以公爲尹坐其弟國舅安孝公溫戊戌之禍謫海南及卒與其配礪山宋氏葬于高山密坡谷直子原用衛人禮宋氏判書義蕃女男石雋判官 贈判書孫男璿大提學 贈領敦寧女適佐郞河悌明曾孫曰安仁節度使安義靑城尉安禮郡守安智牧使 贈兵叅安信直長女適寧原君澧玄孫曰淡僉樞濱郡守淳都正溏僉樞澧有學行自是子姓漸昌光門郡守光彦叅贊光亨訓導光庭叅奉光憲府使鎬典籍 贈大司憲鐸宣傳敏謙主簿民覺縣令之源領議政之漢叅議之溟翰林瀷叅奉楫直提學梯叅奉益善府使益顯靑平尉益成縣監榗兵使世日進士有學行星鎭判敦寧衡鎭翰林有鎭大司憲定鎭縣監昌鎭有學行翔雲承旨斗永進士敦永承旨樂洙叅議樂臣御將樂麟進士樂弼郡守宜弘兵叅宜平牧使魯正都事遠悅牧使定澤有學行遠韺都正遠彬遠翼厚澤今承旨選澤鍾舜今郡守襲慶流陰絓組相承世著休聞於乎盛矣所恨志業風裁不少槪見幷與生卒履歷載籍無徵墓亦舊失其處後孫郡守廷老來永等廣詢搜得遂築土而封將伐石而表楚山使君言求使其族胤澤相元請余記其陰畧綴如右俾後之人知仁壽公之藏焉而曰仁壽是國初 東宮侍講之官非其人不使而必使公則公之學述德行雖不足於文獻於以見其爲公矣然則過此者其有以式之也時重光赤奪若大壯上澣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

     經筵官書筵官 恩津 宋秉璿 撰
通仕郞行義禁府都事 宋秉洵 書


인수부윤공휘징묘표(번역문)
오세(五世) 가정대부(嘉靖大夫:從2品) 인수부윤공(仁壽府尹公)의 휘(諱)는 징(澄)인데 생신(生辰)과 졸년(卒年)의 기록은 전(傳)하는 것이 없고, 기일(忌日)은 4월17일이며 묘소는 고산현(高山縣) 지금의 완주군 화산면 밀파곡 사립봉 임곡(完州郡 華山面(구 雲西面) 密坡谷 蓑笠峰 壬脈)에 정남향(正南向)으로 모셔져 있다.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호조판서(戶曹判書) 송의번(宋義蕃)의 따님인데 부인(夫人) 역시 생신(生辰)과 졸년(卒年)의 기록은 전(傳)하는 것이 없고 기제(忌祭)는 정월(正月) 13일이며 묘소는 부윤공(府尹公) 묘소와 같은 곳에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셨으며,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바로 양혜공(良惠公)이다. 묘표(墓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 이곳은 11세 조상이신 부윤공(府尹公) 심징(沈澄) 그리고 그의 배위(配位) 여산 송씨(礪山宋氏)이신 판서 송의번(判書 宋義蕃)의 따님 두 분의 체백을 모신 상하분(上下墳)이다.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고려 말엽(末葉)에 위위시승(衛尉寺丞) 벼슬을 지내신 휘(諱) 홍부(洪孚)를 비롯, 합문지후(閤門祗侯)이신 휘 연(淵)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이신 휘 용(龍), 그리고 청성백(靑城伯)이신 휘 덕부(德符), 이 네분은 부윤공(府尹公)의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부(祖父) 및 아버지 되는 어른들이시다. 한편 판관(判官)인 석준(石雋), 관찰사이신 선(璿), 절도사(節度使)이신 안인(安仁), 군수(郡守)이신 빈(濱), 좌참찬(左叅贊)인 광언(光彦), 감찰인 금(錦), 부사(府使)이신 종침(宗忱), 감역(監役)이신 설(첁), 영의정(領議政)이신 지원(之源), 부사(府使)이신 익선(益善) 등 훌륭한 인물(人物)이 부윤공(府尹公)의 후손들이다. 대대로 벼슬이 계속되어 세상에 명문(名門)으로 알려진 것은 부윤공(府尹公)께서 쌓은 공덕(功德)의 증거라고 하겠다.
아! 부윤공(府尹公)은 세종(世宗) 임금의 국구(國舅)인 아우 온(溫)의 화(禍)에 연좌(連坐)되어 해남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시다. 고산 밀파곡(高山 密坡谷)에 오향(午向)으로 안장하였다. 부윤공(府尹公)의 생졸(生卒)과 사적은 오늘날 너무나 오랜 세대(世代)를 보냈으므로 전(傳)하여 오는 기록이 없고 난리를 겪으면서 묘소(墓所)는 잃어버렸다. 후손 정로(廷老)가 덕은군수(德恩郡守)로 부임하여 믿을만한 서류(書類)에 의해 묘분(墓墳)을 개축(改築)하고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때는 숙종(肅宗:西紀 1710年) 경인(庚寅)이다. 비문(碑文)은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수부윤(仁壽府尹)이신 심공(沈公)의 본관(本貫)은 청송인(靑松人)으로, 휘는 징(澄)이시며, 고려 말엽(末葉)에 위위시승(衛尉寺丞)이신 홍부(洪孚) 할아버지가 공(公)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연(淵)이시고 벼슬은 합문지후(閤門祗侯)이시며, 할아버지의 휘는 용(龍)이시고 벼슬은 전리정랑(典理正郞)에 증(贈)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시며, 아버지의 휘는 덕부(德符)이신데 우리 조선조(朝鮮朝)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은 좌의정(左議政)이며 청성백(靑城伯)에 봉(封)하였다. 태종(太宗)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비로소 인수부(仁壽府)를 설치하여 공(公)을 부윤(府尹)으로 발령하였는데 그의 아우 세종국구(世宗國舅), 안효공(安孝公)이신 온(溫)과 함께 화(禍)를 당하여 무술(戊戌:1418)년에 해남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였다.
공(公)의 배위(配位) 여산 송씨(礪山宋氏)와 함께 고산 밀파곡(高山 密坡谷)에 상하분(上下墳)으로 모셨는데 배위(配位)는 판서(判書) 송의번(宋義蕃)의 따님이시다. 아들 석준(石雋)의 벼슬은 판관(判官)에 판서(判書)가 증직(贈職)되었고, 손자 선(璿)의 벼슬은 대제학(大提學)에 영돈녕(領敦寧)이 증직(贈職)되었다. 따님은 좌랑(佐郞)인 하제명(河悌明)에게 출가하였다. 증손(曾孫) 안인(安仁)은 절도사(節度使), 안의(安義)는 청성위(靑城尉), 안례(安禮)는 군수(郡守), 안지(安智)는 목사(牧使)에 증(贈) 병조참의(兵曹叅議)이며, 안신(安信)은 직장(直長)이고, 따님은 영원군(寧原君)인 예(澧)에게 출가하였다. 현손(玄孫)에 담(淡)은 첨지중추(僉知中樞), 빈(濱)은 군수(郡守), 순(淳)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당(쩩)은 첨지중추(僉知中樞), 예(澧)는 학문과 덕행(德行)이 있었다. 이렇게 자손이 점차 번창하여 광문(光門)은 군수(郡守), 광언(光彦)은 좌참찬(左叅贊), 광형(光亨)은 훈도(訓導), 광정(光庭)은 참봉(叅奉), 광헌(光憲)은 부사(府使), 호(鎬)는 전적(典籍)에 증(贈) 대사헌(大司憲), 탁(鐸)은 선전(宣傳), 민겸(敏謙)은 주부(主簿), 민각(民覺)은 현령(縣令), 지원(之源)은 영의정(領議政), 지한(之漢)은 참의(叅議), 지명(之溟)은 한림(翰林), 익(瀷)은 참봉(叅奉) 즙(楫)은 직제학(直提學), 제(梯)는 참봉(叅奉), 익선(益善)은 부사(府使), 익현(益顯)은 청평위(靑平尉), 익성(益成)은 현감(縣監), 榗은 병사(兵使), 세일(世日)은 진사(進士), 학(學)은 학문과 덕행(德行)이 있었고 성진(星鎭)은 판돈녕(判敦寧)이며 형진(衡鎭)은 한림(翰林), 유진(有鎭)은 대사헌(大司憲), 정진(定鎭)은 현감(縣監), 창진(昌鎭)은 학문과 덕행(德行)이 있었다. 그리고 상운(翔雲)은 승지(承旨), 두영(斗永)은 진사(進士), 돈영(敦永)은 승지(承旨), 낙수(樂洙)는 참의(叅議), 낙신(樂臣)은 어장(御將), 낙린(樂麟)은 진사(進士), 낙필(樂弼)은 군수(郡守), 의홍(宜弘)은 병조참의(兵曹叅議), 의평(宜平)은 목사(牧使), 노정(魯正)은 도사(都事), 원열(遠悅)은 목사(牧使), 정택(定澤)은 학문과 덕행(德行)이 있으며 원영(遠韺)은 도정(都正), 원빈(遠彬), 원익(遠翼) 후택(厚澤)은 현재 승지(承旨)이고, 선택(選澤), 종순(鍾舜)은 현재 군수(郡守)이니 공(公)께서 남기신 음덕(蔭德)으로 벼슬이 대대로 계승되어 온 세상에 유명한 문중(門中)이 되었으니 아! 참으로 성(盛)하기만 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公)의 얼이 담긴 업적과 늠름하신 풍채를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고, 아울러 생졸(生卒), 이력(履歷) 등을 고증(考證)할 길이 없으며, 묘소마저 잃어버렸다가 다행히 후손에 군수(郡守)인 정로(廷老), 내영(來永) 등의 노력으로 묘소를 찾아 경(境)을 쌓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심길구(沈吉求) 초산군수(楚山郡守)가 윤택(胤澤), 상원(相元) 두 사람을 나에게 보내어 비(碑) 뒷면에 새길 글을 요청(要請)하기에 대략 이상과 같은 글을 엮어서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인수부윤공(仁壽府尹公)의 묘소(墓所)를 알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수부윤(仁壽府尹)은 우리 나라 국초(國初)에 세자(世子)를 모시고 학문을 강론하는 벼슬이므로 그 위치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그 자리를 맡기지 않았다. 그 소중한 자리를 맡겼으니 비록 공(公)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적(文獻的) 자료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공(公)께서 깊은 학문을 쌓았다는 것은 분명(分明)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기 1710년 신축 6월(西紀 1901年 辛丑 6月) 초순에
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 시강원찬선 경연관서연관인 은진 송병선 짓고
통사랑 행 의금부도사 송병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