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재


경의재
소재지: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경의재창건기(景義齋刱建記)
태일(太一)이 조판이래망망(肇判以來茫茫)한 양의간(兩儀間)에 천황(皇天)이 만물(萬物)을 시생(始生)시키시면서 인간(人間)에게는 그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생생화육(生生化育)을 이어가게할 생존질서(生存秩序)의 본원(本源)이 곧 인기강상(人紀綱常)이니 배달(倍達)겨레도 단군성조이래(檀君聖祖爾來) 오천년역사(5千年歷史)를 이어오면서 국조(國朝)는 누혁(累革)되었어도 민족정기(民族正氣)와 망상(綱常)만은 면면(綿綿)히 이어내려 민족영생(民族永生)의 혼(魂)을 가꾸어온 추축(樞軸)이 되어왔기에 고려(高麗)도 건국이래(建國爾來) 인헌공 강감찬(仁憲公 姜邯贊) 문숙공 윤관(文肅公 尹瓘) 시랑공 하공진(侍郞公 河拱辰)外 수많은 대의정충(大義貞忠)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오백년종사(五百年宗社)를 이어왔으며 이번 이곳 덕천정역(德川靖域)에다 새로 향단(享壇)을 받들게된 고려전리판서 악은심선생 휘 원부(高麗典理判書 岳隱沈先生 諱 元符)께서도 고려(高麗)의 교목세신(喬木世臣)으로 조국(祖國)을 위란(危亂)에서 구(救)하지 못하신 망국유신(亡國遺臣)이 되시면서 부귀(富貴)는 초개(草芥)같이 목숨은 홍모(鴻毛)같이 버리시고 나의 입산일(入山日)을 사일(死日)로하라 하신 유명(遺命)을 남기시고 두문동(杜門洞)에서 드디어 순절(殉節)하시어 이 겨레 강상(綱常)을 만고(萬古)에 더욱 밝혀놓으신 분이시니 公은 청송심씨비조 청기군(靑松沈氏鼻祖 靑己君)의 증손(曾孫)이시며 이세조합문지후공 휘연(2世祖閤門祗侯公 諱:淵)의 孫子이시며 삼세조청화부원군 휘:용(3世祖靑華府院君 諱:龍)의 둘째 아드님으로 1330年間에 부원군(府院君)의 새로운 전거향(奠居鄕)이시던 안동인능촌(安東大陵村)에서 나시었으니 어리실때부터 천자(天資)가 수미(粹美)하시고 혜지(慧智)가 초륜(超倫)하시와 천일(天日)의 조경(照鏡)으로 인(因)한 상하천광(上下天光)을 인아(隣兒)들에게 설유(說諭)하신 총명(聰明)과 몽학기(蒙學期)에 드시면서 왕촉(王蠋)의 퇴경어야(退耕於野)를 엄권장탄(掩卷長嘆)하신 비범(非凡)은 장노(長老)를 경탄(驚嘆)케 하시었다는 일화등(逸話等)은 가승(家乘)으로 전(傳)해오고 있으며 다시 대릉촌(大陵村)에서 신라(新羅)때부터 심성(沈姓)과는 유서(遺緖)깊은 안성(安城)으로 천거(遷居)하시면서 여기서 익재(益齋)李先生을 사사(師事)하시었고 1371年에 부부인(府夫人) 김씨상(金氏喪)을 당(當)하시와 애훼(哀毁)3年동안 안성(安城) 여영(廬塋)에 계시면서 1373年 가을에는 포은(圃隱)에게 사화서한(史華書翰)을 보내시었고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후일두문충현(後日杜門忠賢)들과도 교의(交誼)가 두터워지셨으며 복결후(服闋後)에 다시 출사(出仕)하시어서 공양왕조(恭讓王朝)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승서(陞敍)되시었으나 이때를 전후(前後)한 고려국정(高麗國情)은 왜구(倭寇)와 북방몽고족(北方蒙古族)들의 거듭되는 침략(侵略)으로 민심(民心)은 서설(棲屑)하고 원명(元明)의 왕조체질(王朝替迭)로 빚어진 국론(國論)의 분열(分裂)과 권신(權臣)들의 발호(跋扈)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망국조짐(亡國兆朕)은 더욱 심화(深化)되어 가면서 1388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서 요동정벌(遼東征伐)이 의거(義擧)냐 유계(謬計)냐를 놓고 간과(干戈)로 맞서다가 마침내 건국이래(建國爾來) 일관(一貫)된 고려(高麗)의 국책(國策)이었던 구강회복정책(舊疆回復政策)은 도리어 공요죄(攻遼罪)로 충역(忠逆)이 전도(顚倒)되어 최영장군(崔瑩將軍)은 참형(斬刑)되고 새로운 사대기반(事大基盤)이 굳어지면서 고려고가세족(高麗古家勢族)들은 急速度로 사양(斜陽)길을 걷고 있는 수삼년(數三年)사이에 태조이성계(太祖李成桂)를 중심(中心)으로한 신흥무인호족(新興武人豪族)들의 신천지(新天地)가 눈앞에 전개(展開)되니 이때를 전후(前後)하여 벌써 목은(牧隱)은 유배(流配)되고 운곡, 야은(耘谷, 冶隱) 外 지조(志操)를 달리하신 여조충신(麗朝忠臣)들은 은둔(隱遁)하신 후인 1392年 4月4日에 포은(圃隱)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殉節)하신것을 고비로 패도정란(覇道政瀾)이 분별(分別)없이 뒤얽힌 패도(覇道)의 위세하(威勢下)에서 명분(名分)을 바꿔가며 동(同) 7月12日에 공양왕(恭讓王)은 폐위(廢位)시켜 원주(原州)로 폐거(廢居)되고 同 7月17日에 태조이성계(太祖李成桂)가 수창궁(壽昌宮)에서 등극(登極)하면서 前부터 종순(踵循)하여오던 전조유신(前朝遺臣)들의 회유포섭정책(懷柔包攝政策)으로 태조구저경덕궁(太祖舊邸敬德宮)에다 과장(科場)을 부설(敷設)하고 신조(新朝)에 취사(就仕)할 것을 청(請)했으나 이때에 악은선조(岳隱先祖)께서는 공양왕(恭讓王)이 피위(避位)되던 7月12日에는 이 세상(世上)에 살뜻이 없으심을 시(詩)로서 고숙 민농은(姑叔 閔農隱)에게 보이시었고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하던 7月17日에는 입두문동순절(入杜門洞殉節) 하실 뜻을 시(詩)로서 남기신 다음 아드님 대명(待命)시키시고 나의 입산일(入山日)인 이날을 사일(死日)로 하라하신 유명(遺命)남기시고 사저(私邸)를 떠나시어 송도남현(松都南峴)에 오르시와 부조현(不朝峴) 바라보시며 왕촉지언(王蠋之言)을 아소경복(我所敬服)이라 하신 말씀 동지(同志)들에게 남기신 다음 관대조복(冠帶朝服) 고이챙겨 경덕궁동현괘관수(敬德宮東峴掛冠樹)에 걸으시고 폐양립(蔽陽笠) 바꿔 쓰신 후에 杜門洞 찾아드시어서 관문(關門)을 굳게 닫고 세속접인(世俗接人) 끊으시니 이때에 오정문(午正門) 外 청석(靑石)골 서두문동(西杜門洞)에서는 회유(懷柔)하러 나왔던 관원(官員)들이 차례 차례 불을 놓아 전체두문동(全體杜門洞)을 없애려 하였으나 이불에 광겁(恇怯)하여 피(避)하는이 하나없이 가장(家長)이 타죽으면 아내도 뛰어들고 화세(火勢)가 弱해져서 살아남은 충신(忠臣)들은 다음 불에 뛰어들던 세전림선미외(世傳林先味外) 59位 충신(忠臣)들이 악은선조(岳隱先祖)와 최후(最後)를 같이하시었고 보봉산북고월리동두문동(寶鳳山北古月里東杜門洞)에 들어가신 세전사십팔문무장신(世傳48文武將臣)들은 찾아온 신조이신(新朝貳臣)들의 패의불충(悖義不忠)을 노호질타(怒號叱咤)하니 부귀(富貴)에 현혹(眩惑)되고 세도(勢道)에 뢰동(雷同)된 패세(覇勢)의 위세하(威勢下)에서 그 정순의설(貞唇義舌)들을 마종(馬鬃)으로 천봉추살(穿縫椎殺)한 의혈(義血)이 여항(閭巷)에 임리(淋쬚)했다하며 其外 팔판동(八判洞) 간의동(諫議洞)外 이곳저곳 수(數)없이 연달았던 참학등비절참승(慘虐等悲絶慘勝)한 모습과 렬렬의기(烈烈義氣)에 위압(威壓)되어 형관(刑官)이 刑을 늦추면 위명죄(違命罪)로 罰을 받고 사관(史官)이 직서(直書)하면 기휘죄(忌諱罪)로 류배(流配)되고 분재(焚災)된 유해(遺骸)마저 거둬줄이 하나없는 처량(凄凉)한 요요공곡(寥寥空谷)에는 강산(江山)도 오열(嗚咽)했고 초수(樵叟)도 울고 지났다는 이곳 동서두문동(東西杜門洞)에서 장렬(壯烈)하게 최후(最後)를 같이하신 열열정충(烈烈貞忠)과 강개성인(慷慨成人)은 국법(國法)으로 기휘(忌諱)시켜 그 이름마저 겨우 전(傳)하는 이는 문정공 임선미, 시중 조의생(文正公 林先味, 侍中 曺義生)外 맹씨(孟氏)로만 전(傳)하는 세분 뿐이며 악은선조사적(岳隱先祖事蹟)도 세칭(世稱) 서두문동(西杜門洞) 52 或은 59位와 같이 순절(殉節)하신 여말오은(麗末五隱)의 한분으로 전(傳)하기도 하고 或은 동두문동(東杜門洞) 48將臣과 같이 순절(殉節)하신 십은(十隱)의 한분으로도 전래(傳來)되어 정확(正確)한 순절지(殉節地)는 동서두문동중(東西杜門洞中) 어디인지 기송무징(杞宋無徵)이나 서두문동(西杜門洞)일 것이라는 향로요전(鄕老謠傳)에 의거전래(依據傳來)되어 올뿐이며 세칭두문동(世稱杜門洞) 72賢의 전래설(傳來說)도 杜門洞분재(焚災) 以後부터 종적(蹤蹟)이 묘연(杳然)해지신 많은 전조충신(前朝忠臣)을 비롯한 기타항절정절신(其他抗節靖節臣)에서 포은(圃隱)外 다른 여러 리학계대현(理學界大賢)들에 대한 후학(後學)들의 존모정성(尊慕精誠)에서 휘모(彙慕)되신 사학계(斯學界)의 세전(世傳)일 뿐이며 더욱이 岳隱先祖事蹟은 當代에 고굉지신(股肱之臣)이시었던 点으로 미루어 기휘종순(忌諱踵循)이 더욱 삼엄(森嚴)했을 것이니 이태조(李太祖) 등극후(登極後)인 1392年에서 1395年 사이에 새로 편찬(編纂)된 고려사(高麗史)에 덕업훈공(德業勳功)은 모두 력사(歷史)에서 무화(無化)되고 과방목(科榜目)에 삭과(削科)되신 청송심씨향파선조(靑松沈氏鄕派先祖)이시니 절의(節義)의 뒤를 이은 아드님 3兄弟분 모두가 유명(遺命) 받들어 스스로 부귀영화(富貴榮華)에 초연(超然)하신채 정거종순(停擧踵循)의 위압(威壓)밑에서 하추남향(遐陬南鄕)으로 원돈(遠遯)하시어 도광회명(韜光晦名)과 안빈락도(安貧樂道)로 세업충효(世業忠孝)의 두문가성(杜門家聲)을 면면(綿綿)이 이어온 륙세기(6世紀)가 지난 오늘에 판서(判書) 그자리 이은 예손(裔孫)나시었고 대한(大韓)땅 이 강토(疆土) 위에는 거리에서 학교(學校)에서 충효립국(忠孝立國)의 현수막(懸垂幕) 나부끼니 재천(在天)하신 영령(英靈)도 옹용부감(雍容俯鑑)하실듯! 망망세한(茫茫世恨)부치고 달랠곳은 그래도 이 강토내 겨레 뿐이던가 감회(感懷) 새삼 느껴집니다.
이래(爾來)로 유구(悠久) 590餘年동안 상증(嘗烝)을 궐여(闕如)해온 세세통한(世世痛恨) 어린 종중(宗中)에다 대종회(大宗會)가 창설되던 1971年 가배절(嘉俳節)을 前後하여 안동례안종중(安東禮安宗中)으로부터 와룡면가장실(臥龍面佳藏室)에 심판서묘소(沈判書墓所)가 계시다는 제보(提報)에 의하여 곧 재경동파종중(在京同派宗中)에서 누차구수협의(累次鳩首協議)한 결과 청송(靑松) 안동(安東) 仁同等 경남북(慶南北) 각지(各地)에서 회집(會集)한 40餘 첨종(僉宗)이 현지(現地)에 체류(滯留)하면서 2回에 긍(亘)하여 향로구전청문(鄕老口傳聽聞) 및 현지등참답사(現地登參踏査) 수석채심개광봉심(竪石採審開壙奉審)까지 하면서 반복심사(反復深思) 하옵건대 용혹가기(容或可期)의 의금반장(衣襟返葬)이라도 봉심(奉審)될까하는 요행(僥倖)을 바랐을 뿐 모두가 당시(當時)의 정세(情勢) 착각(錯覺)으로 因한 도로(徒勞)에 그치고 현연혼루회정(泫然渾淚回程)하였으며 이어 의령군모의리외수개소(宜寧郡慕義里外數個所)의 심판서묘소운위처(沈判書墓所云謂處)와 유적등(遺蹟等)을 대종회임원(大宗會任員)들이 뜻을 모아 답사(踏査)하면서도 흔오앙사(昕寤仰思)하옵건대 모두가 있을 수 없는 허황(虛荒)된 꿈이었다는 단정(斷定)아래서 1972年3月에서 1974年間에 이르는 3年間에 긍(亘)하여 안동(安東) 대구(大邱) 부산(釜山) 청송(靑松) 서울 등지에서 연륙회종중회합(連6回宗中會合)을 갖고 설단봉향(設壇奉享)에 對한 협의(協議) 및 설단영역(設壇塋域)을 심구(尋究)한 결과(結果) 주손향(胄孫鄕)이며 보광인국(普光隣局)인 성주봉류록덕천정역건좌원(聖主峰流麓德川靖域乾坐原)에다 향단역(享壇域)을 定하고 기(旣)히 배정(配定)된 派錢2530萬餘원 外에 거의를 국내(國內) 및 일본교우후손(日本僑寓後孫) 및 방후손(傍後孫)들의 헌성(獻誠)하신 정재(淨財) 사이오오만여(4255萬餘)원 총합(總合) 육칠팔오만여(6785萬餘)원으로 경시(經始)하여 1976年 12月初6日 개기고유제(開基告由祭)를 봉행(奉行)하니 향단역(享壇域)은 總937坪이며 재각 18간 문루사 7간 관리(齋閣18間 門樓舍7間 管理) 및 수소등(需所等) 10餘間 總合 35間으로 엄선(嚴選)된 용쟁(用材)와 현지임원(現地任員)들의 성의(誠意)어린 감동(監董)과 전체종중(全體宗中)의 모앙정성(慕仰精誠) 모아져서 1982年7月15日 준공(竣工)을 보면서 다시한번 염임추유(斂袵推惟)하옵건대 이 향단사재(享壇祀齋)는 곧 악은선조(岳隱先祖)의 천만고강상(千萬古綱常)을 이 조국강토(祖國疆土) 위에다 길이 심어 놓으실 대의정충(大義貞忠)의 상징(象徵)인 同時에 오늘의 난국(難局)을 헤어나갈 호국(護國)의 정신전당(精神殿堂)임을 자부하고 싶사오니 오늘의 시세추이(時勢推移)에 우척(憂惕)을 같이하실 첨군자(僉君子)의 뜻도 같으시리라 믿습니다. 또 한가지 이 재각(齋閣)에 올라 숙연추모(肅然追慕)되는 바는 백종선조허강공(伯從先祖虛江公)과의 우애우독(友愛尤篤)하시었던 두분 영령(英靈)이 훈창지화(壎唱篪和)하시며 이곳 덕천동천(德川洞天)에서 우러러 보광령영(普光靈塋)을 요읍(遙揖)하시며 옹용상양(雍容徜徉)하실듯 하옴에 생각이 미치면 이곳 향단(享壇)은 전체청송침문(全體靑松沈門)의 숭조상문(崇祖尙門)과 돈목(敦睦)의 전당(殿堂)으로도 받들고 싶은 동시(同時)에 그날 저 만수산(萬壽山) 아래서 같이 항절순절(抗節殉節)하신 려조충신(麗朝忠臣)을 비롯한 국내(國內) 여러 은둔향(隱遁鄕)에서 정절(靖節)하신 전조충현(前朝忠賢)의 연원고가(淵源古家)들의 세의강론(世誼講論)과 성기상응(聲氣相應)할 선의(先誼)어린 전당(殿堂)으로도 우러러 보고저하면서 외람(猥濫)되게 악은선조(岳隱先祖) 입두문순절(入杜門殉節) 오백구십여년(590餘年)만에 창건(刱建)된 이 재각(齋閣)에 창건기문(刱建記文)을 써서 드리나이다.

      1979年10月8日
18代孫 靑松沈氏大宗會長
大檢察廳 檢事 聖澤 謹記
21代孫 載鎬 謹書


경의재기(景義齋記)
景義齋者在靑松治西巴川之德川里是爲我 先祖典理判書岳隱先生作而寓慕致齋之所也竊伏念 先生以聰明純粹之姿師事益齋李先生與鄭圃隱先生友善逮麗運訖矢志罔僕入杜門洞有言志曰王蠋之言我所敬服其貞忠高節與圃牧諸賢相爲伯仲而足令百世景仰也惟其墳墓失傳展省無所爲其後裔者孰不飮泣痛歎也哉是以去壬子秋會合各派宗員于大邱乃有一般公議將欲設壇建堂且立神道碑其下以爲俎豆崇奉之擧而事巨力綿猝難始役故姑且遷延時月更加十分商論而洎乎去年壇與碑與堂皆次第遂成矣堂制爲五架六楹而頗致宏敞門坦廚庫亦쪭備具扁之曰景義齋若言其經費之所自出則族人之在海外者多有誠金贊助又得大宗各派之優助午成就得累百年末遑之事此豈非我祖宗之默佑他歟功旣成族兄相縉氏以宗議致書囑相碩爲之記相碩辭以人微文拙而不獲則乃爲之言曰自今遠近宗族齊會一堂共修奉先之道與講敦睦之 誼以之薦久闕之奠以之致如在之誠則先祖之精靈豈不陟降顧歆於斯乎進此而又講究守護維持之策益思闡揚 先祖之潛光幽德篤修繼述之道而人有所共勉世有所相詔則雖其後來爲百千歲之久遠吾家聲韻永有以不墜而斯齋也亦與之永久無廢矣惟願諸宗盍相與勉旃若夫山川雲物之勝죏鳥魚飛躍之形態無暇備述而聊付登臨者之自得焉

歲己未五月端午節
後孫 相碩 盥手 謹記


경의재는 청송군 서쪽 파천의 덕천리에 있으니 우리 선조 전리판서 악은(岳隱)선생을 위하여 지어서 우리들이 사모하고 재계(齋戒)하는 곳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생께서는 총명하고 순수한 자질로 익재(益齋) 이선생과 정포은(鄭圃隱)선생으로 더불어 좋은 벗으로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 벼슬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말씀하기를 왕촉(王蠋)의 말을 존경하여 복종한다 하였으니 그 충성스러움과 높은 절개는 정포은 이목은 제현(諸賢)과 더불어 우열을 가릴 수 없고 오래도록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보게 되었다. 오직 그 묘소가 실전되어 성묘할 곳이 없으니 그 후손 된 자 누가 눈물 흘리고 슬퍼하며 한탄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므로 지난 임자년 가을에 각 파 종원들이 대구에서 회합하여 일반공의로 장차 설단하고 사당을 지으며 신도비를 세우고 그 아래에서 제사를 받들려고 하였으나 일은 크고 재력은 모자라 졸지에 일을 시작하기 어려웠으므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다시 십분 상의하여 작년에야 단과 비와 사당을 차례로 지었다. 사당의 규모는 오가육영(5架6楹)으로 굉장히 크고 문과 담장 부엌 창고도 대략 갖추고 간판을 경의재라 써서 걸었다. 그 경비가 나온 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해외에 거주하는 일가들이 많은 성금을 내어 찬조하였고 또 큰 종중의 각파에서 넉넉하게 찬조하여 성취하므로 여러 백년동안 이루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조상의 묵묵한 가운데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일이 끝나자 족형 상진(相縉)씨가 종의(宗議)로 편지를 보내어 상석(相碩)에게 기(記)를 지으라 하니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고 글도 잘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여 다음과 같이 지었다.
이제부터 원근의 일가들이 한 사당에 모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내고 돈목하는 의(誼)를 익혀 정성을 다하면 선조의 정령(精靈)이 어찌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시며 여기에서 음향하시지 않겠는가. 여기에 나가 또 수호하고 유지하는 대책을 강구하여 조상의 잠긴 빛과 그윽한 덕을 천양(闡揚)할 것을 더욱 생각하고 계술(繼述)하는 도를 독실하게 닦아서 함께 힘쓰고 대대로 서로 이어나가면 비록 백천년의 오랫동안이라도 우리 가문의 명성이 영원히 실추되지 않을 것이며 이 재실도 또한 길이 폐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원하옵니다. 모든 일가들은 어찌 힘쓰지 않겠습니까. 산천의 경치가 좋고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며 노는 형태는 다 갖추어 쓸 겨를이 없으니 오로지 등림(登臨)하는 사람이 스스로 즐기면 알 것이로다.
   

     기미년 단오절에
후손 상석이 손 씻고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