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조비묘갈

夫人姓金氏贈靑華府院君沈公諱龍之配也公仕麗爲典理正郞有二子長德符左侍中靑城伯諡定安次元符至我 朝以定安公貴追封公爲門下侍中靑華府院君而夫人 恩封若系貫世遠皆無傳獨定安公行狀云辛亥丁母夫人憂守墓安城辛亥卽恭愍王二十年墓在郡西砧頭里其東北五里實旺里公之墓在馬子孫久而益昌大定安之子安孝公溫安孝之子恭肅公澮三世都上相安孝之女 昭憲后六代孫 仁順后皆配 宸極流祉無疆尙公主爲都尉者二人登台鼎任 國家柱石者踵相接而位金玉官臺省者又數十百人非公若夫人積德種善何能致此墓隧尙闕圭首之刻後孫副提學攸判中樞梓與獻納思泓叅知枰監司 大司憲檀士人楷倡中外諸族改築封損財樹石仍屬 識其事傳世系派略具於府院君墓表云崇禎紀元後六十七年甲戌秋後孫監司 撰前叅知枰書

3세조비 묘갈(번역문)
부인(夫人)의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증직(贈職)된 심공(沈公) 휘(諱) 용(龍)의 배위(配位)이다. 公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전리정랑(典理正郞)이 되었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덕부(德符)로 좌시중(左侍中) 청성백(靑城伯)이요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며 次男은 원부(元符)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정안공이 귀(貴)하게 됨으로써 공에게 문하시중 청화부원군을 추봉(追封)하였으나 부인의 은봉(恩封)과 계관(系貫)은 세대가 오래되어 모두 전(傳)함이 없고 유독(唯獨) 정안공의 행장(行狀)에 신해년(辛亥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安城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고만 기록되었으니 신해년은 즉 공민왕(恭愍王) 이십년이다. 묘는 군서(郡西) 침두리(砧頭里:지금의 道基里)에 있고 그 동북쪽으로 오리쯤 되는 실왕리(實旺里:지금의 堂旺里)에 공의 묘가 있으며 자손은 세월이 오래되어 더욱 번창해졌다. 정안공의 아들은 安孝公 온(溫)이요 안효공의 아들은 공숙공(恭肅公) 회(澮)로 3대가 정승을 지냈고 안효공의 따님은 소헌왕후(昭憲王后)요 6대손은 인순왕후(仁順王后)로 다 왕비가 되어 그 복의 혜택이 무궁하였고 公主에게 장가들어 도위(都尉)가 된 분이 둘이요 정승이 되어 국가의 주석(柱石)이 된 분이 대를 이어 나왔고 금관자(金貫子) 옥관자(玉貫子)의 높은 벼슬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에 벼슬한 분이 또한 數十百人 이었으니 공과 부인이 덕을 쌓고 善行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되었으리오 묘소에 아직도 비갈(碑碣)이 없어서 후손 부제학(副提學) 유(攸)와 판중추(判中樞) 재(梓) 현감(縣監) 사홍(思泓) 참지(叅知) 평(枰) 감사(監司) 벌(橃) 대사헌(大司憲) 단(檀) 사인(士人) 해(楷)가 중외(中外)의 모든 일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개축(改築)하고 성금을 모아 비갈을 세움에 나에게 그 사실을 지으라하니 이와 같이 서술(叙述)하고 세계(世系)가 갈라진 것은 대략 부원군의 묘표(墓表)에 기록되어 있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67년 갑술(甲戌:1694년) 가을에
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 벌(橃) 근찬
통정대부병조참지지제교 평(枰)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