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익대부공설단비문

2세조 봉익대부공 휘 晟(성) 제단


증자(曾子) 말씀이 사람이 죽으면 신중을 기하며 삼가하고 오래된 선조도 제향(祭享)을 잘 받들면(愼終進遠) 민덕(民德)이 후(厚)한데로 돌아온다 하였다.
후손된 자 선조를 추모하여 체백(體魄)이 안장(安葬)된 묘소의 수호와 제향을 받들어 정성을 다 함은 후손된 자의 도리이다.
설단(設壇)하여 제향을 받들고자 하는 선조는 청송심씨 시조(靑松沈氏 始祖)이신 고려조 문림랑 위위시승공 휘 홍부(麗朝 文林郞 衛尉寺丞公 諱 洪孚)의 작은 아드님 휘 성(諱 晟)이시다. 공께서는 벼슬과 생년·졸년·행적(表德·生卒·行蹟)과 배위(配位) 성씨를 잃어버렸음으로 7百 여년동안 제향도 받들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으며 다만 족보에 벼슬이 고려조의 벼슬로 종이품(從二品) 봉익대부(奉翊大夫)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상고(上考)할만한 증거가 전혀 없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형님의 손자이신 청성백 휘 덕부(靑城伯 諱 德符)께서 고려조 충숙왕(忠肅王) 무진생(戊辰生:1328년)임을 미루어 생각할 때 공께서는 원종(元宗) 내지 충렬왕(忠烈王:1260~1300) 사이에 충생하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아! 통탄스럽다. 이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하리요.
공의 장자(長子) 연(漣)은 판서(判書)이고 부인은 제주고씨(濟州高氏)이며 묘는 충남 면천(忠南 沔川)이라는 기록뿐이며 또 연(漣)의 아드님 천우(天雨)께서는 목사(牧使)로 부인은 충주강씨(忠州康氏)이며 묘는 봉산 동면(鳳山 東面)이라 하였고 또 그의 아드님 덕귀(德貴)께서는 정랑(正郞)으로 부인은 풍천유씨(豊川柳氏)이고 묘소는 서흥 서면(瑞興 西面)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으로 연 4代의 묘가 실전이다.
봉산과 서흥은 황해도(黃海道)인지라 국토의 분단으로 성묘도 할 수 없게 되었음으로 부득이 공의 현손(玄孫)이며 금화·철원에 거주하는 공의 후손들의 중시조(中始祖)이신 태천현감 관석(泰山縣監 關石)공의 제단(祭壇)이 철원군 근남면 풍암리(鐵原郡 近南面 楓岩里)山327번지에 설단(設壇)하여 망배봉향(望拜奉香)하고 있으며 이제 위 4代(諱:晟 諱:漣 諱:天雨 諱:德貴)를 철원군 동성읍 양지리(鐵原郡 東松邑 陽地里)山31번지와 대(垈)791번지에 제단을 설단하였사오니 선조 4代 영혼께옵서는 구천(九泉)에서 방황을 마치시고 이 제단에 나리시어 정착(陟降定着)하시고 내내 평안하시기를 머리를 숙여 엎드려 바라(叩頭伏願)옵니다.
이 사업은 수대(數代)를 내려오며 이루지 못한 일을 몇년간을 걸쳐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여 조상숭배(祖上崇拜)의 정성으로 이룩하신 후손 의원(宜源) 종회장과 그 집안 일가분들의 정성과 성의를 찬양하면서 공의 비문작성을 부탁함에 거절하지 못하고 삼가 위와같이 글을 짓습니다.

族後孫 普光文化硏究院 相弼 謹識(족후손 보광문화연구원 상필)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