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지촌정사 |
군지촌정사 안채 (전남중요민속자료 제155호) |
군지촌정사 전경 |
약도 소재지: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
어느 민족이나 씨족을 막론하고 선조를 알고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기리며 유물(遺物)을 영구(永久)히 보존하려는 것은 자손(子孫)의 도리(道理)일 것이다.
氏族의 발상신화(發祥神話)와 전설(傳說)로부터 先祖의 행장(行狀)등을 소상(昭詳)하게 알아보는데는 옛날의 문헌(文獻)과 족보등(族譜等)으로 고증(考證)할 수 밖에 없다. 고려(高麗)때 경북청송(慶北靑松)을 본향(本鄕)으로 문림랑(文林郞) 심홍부(沈洪孚)를 시조(始祖)로 이조(李朝)에 이르러서는 개국공신(開國功臣) 청백리(淸白吏) 상신(相臣) 왕후(王后) 애국충신(愛國忠臣) 의사 현인등(義士 賢人等)이 무수히 배출(輩出)되면서 국중(國中) 십대문벌(十大門閥)로 발전되어 왔다. 옥과현(玉果縣)에 낙향(落鄕)하여 士大夫后裔로서 四百餘年間 혁혁(赫赫)하게 살아오면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었으나 임란(壬亂)의 병화(兵火)로 유실(流失)되고 소실(燒失)되어 現存하는 유적(遺蹟)으로는 함허정(涵虛亭)과 누대세거지(屢代世居處)로 삼았던 군지촌정사(涒池村精舍)가 있다. 8世祖 해주목사(海州牧使)께서 남원두동경주김씨가(南原杜洞慶州金氏家)에서 취처(娶妻)하셨고 그 소생(所生)으로 9世祖 도정공(都正公)께서 현재(現在)의 옥과면송전리〔玉果面松田里:고명습상촌(古名濕霜村)〕에 복거(卜居)하시니 낙향(落鄕)의 시초(始初)이고 10世祖 제호정(霽湖亭)께서 입면제월리(立面霽月里) 지촌(池村)에 제호잠거(霽湖潜居)로 건립당호(建立堂號)을 군지촌정사(涒池村精舍)라 불렀으며 이 삼공불환(三公不換)의 승경(勝景)에서 자손대대(子孫代代)로 머물렀다. 군지촌정사(涒池村精舍)가 문화재(文化財)로 지정한 연유(緣由)는 건축양식(建築樣式)에 있어서 특이(特異)하다 하겠다. 450餘年前에 건축(建築)한 本 建物은 몸채는 통상오량(通常五樑)집인데 막 기단(基壇)위에 칠량(7樑)집으로 前面四間 側面二間 작와가(作瓦家)로 뜰방돌을 쌓을때 처마물받이돌을 놓아 뜰방아래의 토사(土砂)의 유실(流失)을 막았으며 연돌(煙突)을 세우지 않고 수평(水平)으로 바로 빼어내 연기(煙氣)로 건물(建物)의 방충방습작용(防蟲防濕作用)을 하게 하는등 현대과학(現代科學)으로도 시공(施工)하기 어려운 건축기교(建築技巧)를 부렸다. 몸채와 사랑채는 대표적(代表的)인 고건축양식(古建築樣式)으로 원형(原形)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있어 국가문화재(國家文化財)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 155號로 西紀1984年 1月10日 지정(指定)되었다. 100里밖 서석산〔瑞石山:무등산(無等山)〕 30里밖 雪山이 한눈에 조망(眺望)되는데 동낙산(動樂山) 北쪽 천마봉(天馬峰)에서 한줄기 서주(西走)하는곳 수목(樹木)이 울창(鬱蒼)하니 여기에 함허정(涵虛亭)이 나래를 폈고 순자강(鶉子江) 물줄기 서출(西出) 동류(東流)하여 굽이침이 몇번이던가 亭子아래 江上의 용암(龍巖)이며 조대(釣臺)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감히 엿볼 수 있는 곳 여기가 바로 제호정공(霽湖亭公)이 세우셨다는 함허정(涵虛亭)이다. 휘(諱) 광형(光亨)할아버지께서는 潜居涒池村精舍하시고 涵虛亭에 올라 수신제가(修身齊家)하셨으니 그 정경(情景) 사뭇 추앙(推仰)할 군자지도(君子之道)요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旅程)에 귀감(龜鑑)이 될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