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재

백호재 (도정공 휘 순 재실)
소재지:전북 순창군 풍산면 향가리


白湖齋重建記(백호재중건기)
이곳 백호재(白湖齋)는 靑松沈公 諱 淳 都正公의 제각(祭閣)이다.
公은 西紀1464年 甲申에 이 世上에 태어나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시고 외가(外家)에서 크셨는데 천품(天品)이 고상(高尙)하시고 총명(聰明)이 뛰어나 10餘歲에 스승의 가르침이 없어도 能히 의리(義理)를 해득(解得)하고 정직(正直)함을 잃지 않으셨다. 이때 公의 고위(考位) 참판공(叅判公) 휘 안지(諱安智)께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계시다. 임지(任地)에서 별세(別世)하셨다는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혈루(血淚)로 슬퍼하시며 해주(海州)로 급(急)히 가시면서 병환(病患)에 약(藥)을 써 드리지도 못하였고 별세(別世)하실 때 임종(臨終)도 못했으니 천지간(天地間)의 한 죄인(罪人)이라고 하시면서 장사후(葬事後) 3年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시며 슬퍼하심이 지극(至極)하셨고 삼년상(三年喪)이 끝난 후에도 성소(省掃)의 禮를 廢하지 아니하시고 종신(終身)토록 사모(思慕)하셨다.
그런 가운데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계시다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으로 전임(轉任)되시었으나 1519年 中宗己卯士禍를 당(當)하여 충신(忠臣)과 어진이가 주살(誅殺)되니 公께서는 개연(慨然)히 벼슬을 그만 두시고 南으로 옥과(玉果)의 군지(涒池)에 내려오셔 이곳 백호산수(白湖山水)에서 소요(逍遙)하시다가 1529年 己丑 6月14日 享年 66歲로 운명(殞命)하셨는데 유명(遺命)에 따라 백호산(白湖山)에 안장(安葬)되시었다.
우리 청송침씨(靑松沈氏) 시조(始祖)는 諱 홍부(洪孚)이신데 여조(麗朝)의 문림랑위위사승(文林郞衛尉寺丞)이시다. 그 자손(子孫)이 번성(蕃盛)하여 李朝때 3王后 사부마(四駙馬) 13政丞을 배출(輩出)한 명문(名門)으로 손꼽히고 있다.
公은 이 家門 始祖의 8代孫이며 옥과침씨(玉果沈氏)의 중시조(中始祖)이신데 옥과향리일원(玉果鄕里一圓)에 후손(後孫)이 천여호(千餘戶)나 살고 있다.
백호산록(白湖山麓)에 公의 제각(祭閣)이 있었으나 노후도괴직전(老朽倒壞直前)이어서 뜻있는 종원(宗員)들이 발기(發起)하여 이 제각건립추진위원회(祭閣建立推進委員會)를 결성(結成)하고 전 종원(全 宗員)의 헌성(獻誠)을 모아 1985年 2月25日 기공(起工)하여 同年 5月19日 준공(竣工)하고 1986年 3月30日 그 준공식(竣工式)을 갖게 되었다.
이 제각(祭閣)의 중건(重建)은 숭조돈족(崇祖敦族)의 위업(偉業)으로서 오늘날 국가(國家)에서 장려(奬勵)하고 있는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을 선양(宣揚)하는 사업(事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이 제각(祭閣)의 중건(重建)을 爲하여 온갖 정성(精誠)을 쏟은 추진위원장(推進委員長) 재수씨(載綉氏)를 비롯한 전 추진위원(全 推進委員)과 헌성종원(獻誠宗員) 여러분의 그間의 노고(勞苦)와 성의(誠意)에 심심(深甚)한 위로(慰勞)와 찬사(讚辭)를 드리고 아울러 그 자손(子孫)들이 면면(綿綿)히 부귀영화(富貴榮華)를 고루 누리기를 빌면서 중건기(重建記)에 갈음한다.

1986年 3月30日
  방예 전라북도지사 재홍 근식(傍裔 全羅北道知事 載鴻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