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보(第10回) 번역문

夫 氏族이 있으면 族譜가 있는 法則과 그의 必要性은 舊譜序文中에 이미 다 말씀하였으니 다시 附言치 않고 但 唯我 靑松沈氏族譜의 由來를 말한다. 이말도 無根之說이 아니라 舊譜序文에 根據하여 좀 明確히 말할 뿐이다. 距今四百十七年前(仁宗十年) 我十四代祖考 安城公 諱 濱께서 創案하시어 收單手草하시다 未完成하시고 百世後에 그 아드님 議政府左叅贊胡安公 諱 光彦께서 遺志를 繼承하여 全羅監司時에 管下 順天府使沈公 通源으로 하여금 手草를 整理하여 諸宗 및 外孫 柳泗의 協力을 얻어 族譜가 創刊되었으니 그 해가 乙巳年이요 이곳이 順天이라 이를 稱하여 順天版 乙巳譜라 한다. 其後 壬戌 戊寅 己丑 癸巳 癸卯 辛巳 庚申 凡八回 續修도 모두 此에서 基準했다. 이런 關係로 不肖도 先祖의 遺志를 繼述코저 此役을 自擔하니 手澤이 尙新하여 感慕不已하와 夙夜匪懈한지 十四星霜에 才踈力綿하여 이제 겨우 修正竣役하니 其間僉宗의 많은 協力을 感謝드리고 本意아닌 遲延을 謝過하면서 如此拙述로서 序를 代하나이다.
      

檀君紀元四千三百五年 壬子 七月
      後孫 鍾益 謹序   

(번역문)
대저 씨족이 있으면 족보가 있는 법칙과 그의 필요성은 예전 족보의 서문중에 이미 다 말씀하였으니 다시 덧붙여 말하지 않고 다만 우리 청송심씨 족보의 내력을 말한다. 이 말도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라 예전의 족보의 서문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말할 뿐이다. 이제까지 417년전(인종1년 1545)에 우리 14대조고 안성공 빈(濱)께서 창안하시어 수단하고 손수 초고하시다가 완성하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뒤에 그 아드님 의정부 좌참찬 호안(胡安)공 광언(光彦)께서 유지를 이어 받으시어 전라감사로 계실 때에 관내의 순천부사 심공 통원(通源)으로 하여금 안성공께서 손수 초안하신 것을 정리하게 하여 모든 일가와 외손 유사(柳泗)의 협력을 얻어 족보를 창간하게 되었으니 그 해가 을사년(인종1년 1545)이며 이곳이 순천이라 이를 일컬어 순천판 을사보라고 한다.
그 뒤에 임술(명종17년 1562), 무인(선조11년 1578), 기축(인조27년 1649), 계사(숙종39년 1713), 계묘(헌종9년 1843), 신사(고종18년 1881), 경신(1920년)의 모두 여덟번의 구보를 이어서 중수한 것도 이 을사보에서 기준하였다. 이런 관계로 불초도 선조의 남기신 뜻을 이어서 서술하고자 이 일을 스스로 담당하니 선조의 손때가 아직도 새로워 마음에 느끼고 사모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히 노력한지 14년만에 재주가 없고 재력이 미약하여 이제야 겨우 수정하여 일을 끝내었으니 그동안에 모든 일가의 협력을 감사드리고 본의 아니게 지연되었음을 사과하면서 이와 같이 변변치 못한 저술로서 서문으로 가름하나이다.
      

단군 기원 4305년 7월에
      후손 종익은 삼가 서함


先儒云家之信譜猶國之信史史貴乎信若不信則非史也
非史則雖多亦奚以爲故宗丈鍾益, 德燮, 弘燮, 完燮, 哲鉉 是之爲憂專擔此役十有餘年筆削正草出財入梓可謂信譜也 噫在昔壬戌
檀紀三八九六年 西紀一五六二年 我十五代祖考監司公諱銓涖全州府尹時取順天板本增續出刊而仍藏焉今譜一遵舊制余對此譜雖非當時完本手澤尙存敢不起敬而追慕耶 不可無一言故爰記所感以附于監司公跋後
      

      檀紀四千三百五年 壬子 仲夏
      後裔 應宙 敬跋   

(번역문)
옛 선비가 말하기를 『집안의 믿음직한 족보는 나라의 믿음직한 역사와 같다』고 하였으니 역사는 믿음이 중요하다. 만약 믿음이 없으면 역사라 할 수 없으니 역사가 아니면 비록 많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종장인 종익(鍾益) 덕섭(德燮) 홍섭(弘燮) 완섭(完燮), 철현(哲鉉)이 이것을 걱정하여 이 족보의 중수를 담당하여 정서하고 재정을 내어 인쇄에 들어갔으니 믿음직한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아! 지난 임술년 단기3896년(서기1562년 명종17년)에 우리 15대조고 감사공(銓)께서 전주부윤으로 계실 때에 순천에 보관한 판본을 증보하여 중수하고 판본을 그대로 소장하시었다. 이번 족보도 한결같이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니 내가 이 족보를 보게 되면 비록 감사공 당시의 완본은 아니더라도 감사공의 손때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감히 공경하여 추모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으로 이에 소감을 기록하여서 감사공의 발문 뒤에 붙이노라.
      

단기4305년(1972년) 임자 5월에
      후손 응주는 삼가 발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