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보(第9回) 번역문

夫敬先崇祖하며 敦宗睦族은 是固東洋道德之根源이요 而寔我邦特有之美風也라. 人各受姓하야 俱有一本而歷代寢久하고 後屬日遠하니 苟不有統紀以明之하고 文獻以徵之면 不幾於忘本之歸而路人之視也哉아 譜也者는 普也니 所以普合宗族而修載之也라. 派系而別之하고 字行而列之하고 歷代之懿行實蹟과 爵諡官位와 與夫配位墓所와 以至生卒年月을 罔不該括하야 按而視之에 雖八域之廣과 百代之遠이라도 暸如指掌하야 皆知其爲同祖子孫하리니 是所謂 孝弟之心이 油然自生而得免爲路人之歸也라. 古人之重修譜良有以也로다. 吾沈이 自始祖文林郞公以來로 迄今垂七百餘年에 子姓이 日繁하야 散在各地하니 雖各有親疎遠近之不同而 自吾先祖視之면 均是子孫而 無差別也라. 苟先祖之意無差別則 爲子孫者 安得不兄弟而相愛也리오 千枝가 同根이요 萬流가 一源이니 于以行崇敬敦睦之實이 豈不韙哉아 前此修譜 凡八次而 最后庚申譜亦旣三十有八年矣요. 其間庚寅之亂은 可謂浩刼滄桑而 人事變遷이 視平時爲倍蓗라 收復之後에 同族安否最先關心일새 是以로 在京에 乃設 大同譜編纂委員會하야 屢經會合하고 繼而修譜之議闖發에 未嘗不以南北不一로 爲趦 而亂後心理有不容一日之緩故로 僉議一決而 不可止하니 自是로 黽勉拮据하야 經數個星霜而 僅得就緖라 至若編纂之方은 與前不同하니 前者엔 韓紙大版이 積數十卷帙하야 價高而備置實難하고 及其有事에 遷動이 亦不容易하야 過去避亂中少數之奉安者 太半爲灰燼盜竊所災害하니 其痛恨이 當何如哉아 僉議 有懲于此하야 活字를 務要精明하고 粧冊을 極求簡便하야 容易携帶하고 且又價廉而便利普及하니 是乃編纂中 最苦心者而 亦可以觀時變矣라 若乃北韓諸族之不能合譜는 最是千古恨事而 是는 限於勢요 非盲於心也라 若果天運이 到來하면 其必有大同之一日하리니 是則有厚望於將來也로다. 今收單이 畢集하고 準備已完하야 將付於剞劂氏할새 以余久管是務也로 僉議屬不侫 一言以爲之序하니 余慚非其人而屢辭不獲故로 略述梗槪하야 以弁卷首云爾라.
      

檀紀四二九○年(丁酉)十二月  日 
      後孫 靑松沈氏大同譜編纂委員會 委員長 福鎭 謹識   

(번역문)
대저 조상을 공경하고 숭모하며 종족이 돈독하고 화목함은 우리 동양의 도덕의 근본이며 우리나라만이 특별히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속이다. 사람마다 각각 성을 받아서 처음에는 한 근본이었다가 여러 세대를 지나는 동안 후손이 날로 멀어져서 기록으로서 밝히고 문헌으로 증험하지 않으면 거의 근본을 잊어버리어 딴 남과 같이 보지 않겠는가. 보(譜)라고 함은 넓히는 것이니 널리 종족을 모아서 족보를 하며 역대의 찬연한 사적과 벼슬, 시호 및 관직과 직계, 배위, 묘소, 출생 및 사망한 연월일까지 모두 기록하였으니 잘 살피어 보면 비록 넓고 백대나 멀더라도 분명하여 모두 같은 조상의 자손이 됨을 알게 되니 이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서 길가는 사람같이 딴 남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 족보를 중수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었음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우리 심씨는 시조 문림랑(文林郞)공으로부터 지금까지 7百여년을 전하여 내려오며 자손이 날로 번성하여 각 지방에도 많은 종인이 있으며 비록 서로 친함과 가까움이 같지 않더라도 우리는 같은 자손으로 차별이 없다. 진실로 선조의 마음이 차별이 없는데 자손들이 어찌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 개의 가지도 뿌리는 같고 만 갈래의 물줄기도 근원은 하나이니 이에 조상을 숭모하고 공경하며 일가간에 돈독하고 화목함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전에 족보를 중수함이 모두 여덟 차례였고 맨 마지막의 경신보(庚申譜)도 또 38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에 경인년(庚寅年:950)의 난리는 나라의 큰 재난으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듯 변화가 많았으며 인사의 변천이 평상시 보다 다섯 갑절이나 되었다. 국토를 수복한 뒤에 같은 일가들의 안부가 가장 먼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로서 서울에 대동보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여러번 회의를 거듭하며 수보하자는 의논이 기회마다 일어났으나 남북이 통합하지 못함으로서 머뭇거리고 진척이 없다가 난리후의 심리가 하루를 늦추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한번 결단하니 중지할 수 없었고 이로부터 쉬지 않고 열심히 힘쓰고 연구하여 두 서너 해를 지나서야 겨우 보사를 발족할 수 있었다. 편찬 방법은 전과 같지 않았다. 전에는 한지의 큰 판본으로 수십권을 한 질로 하여 값이 비싸서 마련하기가 어려우며 또 일이 생겼을 때 자리를 옮기는 것도 또한 쉽지 않으며 지난 피난중에 소수의 봉안한 사람들 중 태반이 불에 타고 도둑의 재해를 당하였으니 그 얼마나 한탄하였겠는가. 여러 종인들의 의논이 위와 같은 일을 깨달아 활자를 깨끗하고 밝게 하는데 힘쓰고 제책을 극히 간단하게 하여 휴대하기에 쉽게 하고 또 값을 싸게 하여 보급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이는 편찬하면서 가장 고심하였던 일이며 또한 시대가 변천하였음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북한에 잇는 모든 일가들을 합보할 수 없었음은 가장 천고의 한이 되는 일이나 이는 정세가 그렇게 된 것이지 마음이 부족하여 그런것이 아니다. 만약 천운이 온다면 반드시 대동 단합하는 날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큰 소망이다. 이제 수단을 다 수집하고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장차 인쇄에 붙이려 하는데 내가 오래도록 이 일을 관장하므로써 여러 사람의 의논이 불초에게 서문을 위촉하기에 내가 사람됨이 부족함을 부끄럽게 여기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으로 간략하게 대강만을 기술하여 서문으로 삼고자 한다.
      

단기4290년(1957)년 정유 12월  일에
     후손 청송심씨대동보편찬위원회 위원장 복진은 삼가 지음


四時遞而歲成, 天地之秩序可見, 一代盡而譜作, 人族之法規, 斯存, 竊惟吾 沈之刱譜, 肇自檀紀三八七八年乙巳(有明嘉靖 仁宗元年), 迄于今四百十有餘年間, 凡九回矣, 其間年代寢遠, 子姓益蕃, 國朝累革, 世道突變, 若無譜牒之證則, 至親將至路人矣, 不肖, 唯是之惧, 竊欲修譜而收族, 以成一族社會, 役巨財綿, 未能遂意, 但與都摠制公派, 諸宗之在原橫者, 經始三年, 僅成派譜一帙矣, 在京諸宗, 創設敦睦會, 修譜之議, 不謀朋興, 近於一年, 爛商幾番, 乃設大同譜編纂委員會而以余有經歷之故, 起余幹譜之役, 縱辭以非其人, 其責益勤, 事難固辭, 乃與委員長以下諸委員, 協力同心, 設譜所于京, 通告于各處諸宗, 不過半年, 收單輻湊, 聯集人員四五萬數, 單金亦至累巨萬圜, 經始無慮, 目今世態, 竟至何境, 先祖之遺蔭, 綿綿不絶, 後仍之秉彛, 耿耿不泯, 固可想矣而諸委員之殫誠盡力, 亦可感也, 先祖以來, 德業節義, 學行宦歷, 文章風操, 詳在世考, 及朝野史乘, 顧余蔑學小孫, 不敢贅說而, 體裁及條例, 亦有先輦前規, 井井班班, 豈敢變更而有所增損者不無, 因時變通之故也, 今者之修也, 雖僻鄕遠族, 期欲盡收而, 或有異議, 名單遲延, 難免遺珠之歎, 是所遺憾者也, 北韓諸宗, 同一吾族而勢難收入, 竟作異域他族, 豈不慨恨之所乎, 校役 告訖 將壽之梓, 僉議囑余以弁首之辭, 不可以不文辭, 乃叙顚末之如右而其所尊祖敦宗勤勉之意, 先輩序文, 已致懇切丁寧, 不須更煩然 竊望吾宗後承, 亦以此惓惓之意, 互相勗勵則, 庶幾不替於 萬斯年矣

檀紀四二九○年(丁酉)十二月  日 
      後孫 靑松沈氏大同譜編纂委員會 校正委員長 宜聖 謹序   
(번역문)
사계절이 바뀌어서 한 해가 되어 천지의 질서를 볼 수 있고 한 세대가 다하여 족보를 만들었으니 인족(人族)의 법규가 여기에 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 심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한 것은 단기3878년 을사(인종1년 1545)년으로부터 비롯하여 이제까지 410여년 동안에 모두 아홉 번을 수보하였다. 그 사이에 연대가 매우 오래되고 자손이 더욱 번창하며 조정이 여러번 개혁되고 세상의 도리가 갑자기 변하여 만약 족보가 없으면 친한 이가 장차 길가는 딴 남과 같이 된다. 불초가 이를 두려워하여 족보를 중수하고 일가를 수합하여 한 종족사회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일이 크고 재력이 미약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으며 다만 도총제공파인 원주와 횡성의 종인들과 보사를 시작한지 3년만에 겨우 파보 한 질을 만들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일가들이 돈목회를 창설하고 족보수단을 의논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1년이 가까워서야 몇 번의 의논 끝에 비로소 이 대동보편찬위원회를 설립하니 내가 경력이 있다 하여 나에게 족보의 일을 주관하게 하거늘 내가 그 일을 맡을만 하지 못하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함이 더욱 간절하여 굳이 사양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위원장과 모든 위원이 함께 협동하여 보소를 서울에 설치하고 각처의 모든 일가들에게 통고하니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수단이 많이 모여들어 수집한 인원이 4, 5만명이며 단금(單金)도 또한 수십만환이 되니 보사를 하는데 염려가 없게 되었다. 지금의 세상 형편이 어떠하더라도 선조의 크신 음덕이 지속되어 끊이지 않고 후손의 타고난 천성과 떳떳한 도리를 지키어 밝게 빛내고 민멸(泯滅)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으며 모든 위원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는 것도 또한 감동할 만하다. 선조이래로 덕업과 절의와 학행과 관력과 문장과 높은 지조는 세고(世考)와 역사와 야사(野史)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나의 학문을 모르는 어린 손자를 돌아보건대 감히 쓸데없는 말을 할 수 없으며 체제와 조례도 또한 선배께서 규정한 전규(前規)가 있어 조리가 정연하고 분명하니 어찌 감히 변경하리오마는 변경된 것이 없지 않았으니 이것은 시대의 변동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번의 수보는 비록 어렵고 시골에 사는 먼 일가라도 다 수합하려고 하였으나 더러는 이의가 있고 명단이 지연되어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는 한탄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랴. 북한에 있는 모든 일가들도 같은 우리 일가인데도 형세가 함께 입보하기가 어려워 끝내 다른 지역의 타족이 되었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교정하는 일이 끝나고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에 여러 종인이 나에게 서문을 위촉하니 문장은 서투르나 사양할 수 없어 그 전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그 조상을 존숭하고 일가간에 돈목하는데 부지런히 힘쓰라는 뜻은 선배님들의 서문에 이미 간절하고 친절하게 말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말할 것이 없도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우리 후손들도 선조의 가르침을 받들어 서로 돕고 함께 힘쓰면 자손만대토록 쇠퇴하지 않으리로다.
      

단기4290년(1957년) 정유 12월  일에
      후손 청송심씨대동보편찬위원회 교정위원장 의성은 삼가 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