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선생안(先生案)〉 군수(郡守)
심윤태(沈尹泰):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심열태(沈悅泰):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심능필(沈能弼):음직(蔭職)이었다.
〈무과(武科)〉
심인제(沈仁濟):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사(判事)였다.
심유우(沈有虞):우후(虞侯)였다.
심광해(沈光海):판관(判官)이다.
심 기(沈 淇):판관(判官)이다.
심사렴(沈嗣濂):직장(直長)이다.
심희숙(沈喜淑):첨정(僉正)이다.
심남유(沈南維):판관(判官)이다.
〈사마(司馬)〉
심능오(沈能五):생원(生員)이다.
〈음사(蔭仕)〉
심능현(沈能賢):감역(監役)이다.
〈학행(學行)〉
심의태(沈宜泰):재예(才藝)가 뛰어났고 월파 정시림(月波 鄭時林)에게 수학하여 문학이 숙취(夙就)하였고 더욱 필법이 묘하였고 유고가 있다.
〈충절(忠節)〉
심 구(沈 溝):성품(性稟)이 정직하여 경학(經學)으로 벼슬길에 뽑혀 참봉(參奉) 전적(典籍) 삼조좌랑(三曹佐郞)을 역임하고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내는데 청백(淸白)하므로 칭송을 받았다. 단종(端宗)이 遜位(遜位)할 때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남하(南下)하여 본군 방산하(本郡 舫山下)에 둔적(遯跡)하니 세조조(世祖朝)에서 물색하여 찾았으나 나가지 않고 바위를 의지하여 정자를 만들고 끝내 늙을 곳으로 삼았다.
심항수(沈恒壽):어린 나이에 문한(文翰)으로 세상에 추중(推重)을 받았고 병자호란에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을 좇았고 화의(和議)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닫고 스스로 조용히 지냈다.
〈행의(行誼)〉
심의삼(沈宜三):제가(齊家)를 孝로써 하고 율신(律身)을 禮로써 하며 분전(分田)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다.
〈효자(孝子)〉
심사맹(沈師孟):천성(天性)이 순효(純孝)하여 예로써 몸을 다스리고 나이 70에 구십노모(90老母)를 봉양하되 지체(志體)를 모두 봉양함을 더욱 독실하고 부지런히 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날마다 반드시 성묘하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폐하지 않으니 향리가 감탄하였고 孝로써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심능오(沈能五):효성이 선천적으로 타고났고 양지(養志), 양구(養口)에 정성을 다하였고 집상(執喪)에 슬퍼하며 예를 다하지 않음이 없고 여러 번 향도천(鄕道薦)에 올랐으며 고종조(高宗朝)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심능현(沈能賢):천성이 순효하고 율신(律身)과 어가(御家)를 사례(四禮)로써 하고 청빈(淸貧)하여 누항(陋巷)에서도 지체를 봉양하였고 초상을 당하여는 예를 다하니 향리에서 칭송하였고 고종조(高宗朝)에 감역(監役)이었다.
심의삼(沈宜三):천성이 순인(純仁)하고 효행이 독실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절차를 어려서부터 어기지 않았고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이 지나쳤으니 향리에서 칭송하였고 고종조(高宗朝)에 장릉참봉(莊陵參奉)이었다.
심능선(沈能善):효성이 지극하여 능히 지체(志體)를 다 봉양하였고 집상(執喪)에 애훼(哀毁) 진례(盡禮)하여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심동춘(沈東春):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거상(居喪)에 슬픔을 다하고 제사 받드는데 공경을 다하여 천장(薦狀)이 있다.
심의화(沈宜華):집은 가난하고 부모는 늙어서 밭 갈고 고기 낚아 공양하고 거상(居喪)에 준례하여 날마다 반드시 성묘하였다.
〈효부(孝婦)〉
심 씨(沈 氏):심남기(沈南紀)의 女로 어렸을 때 조모의 병환에 단지주혈 하였고 흉년이 들어 숙부의 가족이 굶주리자 문득 그 사장(私藏)한 포백(布帛)을 팔아 구해주었다.
심 씨(沈 氏):진원 박태수(珍原 朴泰洙)의 처로 규범(閨範)이 정숙하고 구고(舅姑)를 효로 봉양하고 부병(夫病)에 단지주혈(斷指注血)하여 회생(回生)하니 향리(鄕里)에서 흠탄(欽歎)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