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현(현감)

〈가자(加資)〉
심운경(沈雲慶):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다.
심수경(沈首慶):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다.
심인경(沈仁慶):통정(通政)이다.
심 선(沈 銑):통정(通政)이다.
심능철(沈能澈):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다.
심능철(沈能喆):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다.
심의성(沈宜星):의관(議官)이다.
심능중(沈能中):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이다.
심의순(沈宜順):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다.
심홍권(沈弘權):숭록대부 상호군(崇祿大夫 上護軍)이다.
심능조(沈能祚):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다.
침능규(沈能珪):통정대부 의관(通政大夫 議官)이었고 병인(丙寅)에 회근례(回巹禮)를 행하였다.
심영지(沈永之):가선대부 동돈녕(嘉善大夫 同敦寧)이다.
심능연(沈能璉):통정(通政)이다.
심능춘(沈能春):도정(都正)이다.
심의선(沈宜善):동돈녕(同敦寧)이다.
〈유림(儒林)〉
심계년(沈繼年):고려말(高麗末)의 지성주사(知成州事)로서 이태조(李太祖)가 혁명(革命)하자 벼슬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자취를 절에 감추니 태조가 젊어서부터 그 어짊을 알고 물색하여 찾아 여러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벼슬에 나오지 않자 나치(拿致)하여 궁궐에 나오게 하여 외직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에 보임하니 도주(到州)한 날에 벼슬을 버리고 진원산(珍原山)에 숨으니 사람들이 공의 절의를 백이(伯夷)에 비교하고 졸후(卒後)에 례장(禮葬)할 것을 명하고 양계사(良溪祠)에 배향하였다.
심 연(沈 涓):벼슬이 감찰(監察) 전중어사(殿中御使0로서 참판(參判)에 이르렀고 太祖가 승하하자 山에 올라가 통곡하니 눈물이 닿은 암면(岩面)이 핏빛으로 변하여 後人이 심혈암(沈血岩)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청송현(靑松縣)에 있다. 태종(太宗0이 그 지절(志節)과 문학에 감복하여 일찍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낙낙장송(落落長松)은 서리를 능멸하고 눈을 업신여기며 밝고 밝은 명월(明月)은 둥글었다 이즈러졌다 하네 라고 하였고 殷나라 고종(高宗)이 전설을 얻은 것으로써 스스로 기대 하였더니 돌아가자 임금이 크게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겨 장례할 것을 명하고 제수를 하사하였으며 양계사(良溪祠)에 배향되었다.
심종하(沈宗夏:천성이 순후하고 문행(文行)으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충의(忠義)가 탁이(卓異)하여 충순위(忠順衛)였고 벼슬은 참봉이였고 좌승지에 추증(追贈)되었다.
심우신(沈友信):충헌공(忠獻公) 독송재(獨松齋) 신잡(申磼)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두 번 상소하여 국가안위를 논하는 것을 어진이를 쓰고 간신을 물리치는 것으로 말하였다. 장천사(長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심준붕(沈俊鵬):학행(學行)으로써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천자(天姿)가 괴위(魁偉)하고 지효독학(至孝篤學)하였으며 정송강(鄭松江)을 따라 의리를 강명(講明)하였고 지평에 추증되었다.
심세영(沈世英):부귀(富貴)될 마음은 절대 없었고 집에서 전심(專心)으로 시문(詩文)을 익혀 명성(名聲)이 자못 높았고 대암(臺庵)을 지어 금서(琴書)로 스스로 즐겼다.
심사명(沈思溟):학행(學行)으로 교관(敎官)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숙종조(肅宗朝)에서 폐비(廢妃)할 때 항소하여 귀양갔었고 또 여러 번 간신을 물리칠 것을 상소하여 요직에 있는 자의 미움을 받아 다시 귀양가서 이로써 불우하니 그때 본도 감사(本道 監司)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침에 한 봉투로 상소하여 저녁에 千里로 귀양갔으나 충의(忠義)는 늠름(凜凜)하고 쇠속(衰俗)에 바람이 생긴다 하였다.
심사숙(沈思淑):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며 효행이 탁이하여 감역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심봉양(沈鳳陽):문사(文詞)가 첨부(瞻富)하고 필한(筆翰)이 여류(如流)하였다. 이때 경향(京鄕)의 십구종형제(19從兄弟)가 모두 도의문학(道義文學)으로써 서로 높아 1世가 추중(推重)하였고 公이 정자를 별서(別墅)로 지어 간월(間月)로 서로 만나 학문을 강론(講論)하였으며 음직으로 봉상사정(奉常寺正)이었다.
심술도(沈述道):문학과 행의(行義)로써 세상에 알려지니 일시명공거경(一時名公巨卿)이 한번보고 서로 친해져 맞이하였고 유고(遺稿)가 있으며 통덕랑(通德郞)이었다.
심태규(沈台圭):행실을 돈독히 하고 의를 밝히며 안빈락도(安貧樂道)하고 문학에 전심하니 명성이 당세에 重하였다.
심기서(沈麒瑞):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학행이 독실하여 향당(鄕黨)이 칭송하고 여러 번 암행어사의 장계에 들어갔고 벼슬은 참봉이었다.
심정규(沈挺圭):흉금(胸衿)이 고결하고 젊어서부터 기재(奇才)를 품고 은거호학(隱居好學)하여 왕실(王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대의를 주장하고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니 사림(士林)이 탄복하였다.
심 흠(沈 欽):경학행의(經學行誼)로 세상에 추중(推重)을 받았고 사림(士林)의 망중(望重)으로 여러 번 향천에 올랐고 유고(遺稿)가 있다.
심관지(沈寬之):문학이 일찍 성취되어 사림(士林)이 경앙(景仰)하였고 효우(孝友)가 겸지(兼至)하여 세상에 모범이 되었으며 여러번 향천에 올랐고 유고가 있다.
심   삼(沈  鏒):자품(姿稟)이 총명하고 지조가 고결하여 일찍 학문으로써 당세에 저명하였고 유림의 명망이 높았다.
심달문(沈達汶):어려서부터 총민하고 능히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기재(奇才)를 가지고 은거호학하고 평일 근엄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집을 법도로 다스렸다.
심윤지(沈潤之):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하였고 심경예설(心經禮說)의 뜻을 풀어서 밝히니 본종(本宗)의 상신 상규(相臣 象奎)가 조정에 천거하려하자 공이 서신으로써 말렸다. 본도감사 조상인(本道監司 趙相寅)이 일찍이 장계를 올려 천거하지 못하였다 하고 말하기를 백수(白首)의 나이에 경서의 문장을 궁구(窮究)하였고 여사(餘事)로는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안자(顔子)의 어진 즐거움을 행하였다 하였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심능영(沈能泳):효행(孝行)이 탁이(卓異)하고 문학이 일찍 저명하여지고 여러번 향천에 올랐다.
심일지(沈馹之):문학의 연원(淵源)이 깊고 행의가 독실하며 역리천문지리(易理天文地理)에 심오한 지식이 있으니 원근에서 래학(來學)하는 자가 많았다.
심능문(沈能文):효우학행(孝友學行)을 선훈(先訓)에서 이어받아 의례경의(儀禮經義)에 밝으니 사우(士友)가 질의하였고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심능조(沈能祖):성품이 본래 온후하고 영리(榮利)를 불구하며 성리학에 잠심(潛心)하고 효우가 독실하였다.
〈충절(忠節)〉
심우신(沈友信):진무사(鎭撫使)로써 임진왜란에 도원수(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간(黃澗)에서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이기고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과 더불어 진주에 들어가 역전(力戰)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서 순절하니 선무훈(宣武勳)에 록훈(錄勳)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 되었으며 장천사(長川祠)에 배향되었다.
심 극(沈 ):무술(戊戌)에 척화소(斥和疏)를 올렸고 벼슬은 참의였다.
심 계(沈  誡):무술(戊戌)에 兄 후(詡), 극()과 더불어 척화소(斥和疏)를 올렸고 교관(敎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남쪽으로 피하여 영광(靈光)에서 살았다.
심 엽(沈 曄):남한산성의 역(役)에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심세웅(沈世雄):천품이 곧아서 본디 존양대의(尊攘大義)가 있었고 여러 번 척화소를 올리고 문을 닫고 스스로 조용히 지내니 세상에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효행(孝行)〉
심 연(沈  涓):오세(5歲)에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적에 효당갈력, 충측진명(孝當竭力, 忠則盡命)의 구절을 읽고 말하기를 이 글을 지은이가 충효(忠孝)의 도(道)에 능(能)하였던가 하였으니 충효하는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미 현저(顯著)하였다. 친환수월(親患數月)에 홍시(紅枾)가 생각난다 하니 때는 4月이라 구하기가 어렵자 公이 나무를 잡고 울고 있는데 갑자기 여상(女商)이 있어 홍시(紅枾)를 청매(請賣)함에 홍시를 사가지고 와서 드려 병이 낳으니 사람들이 신조(神助)라고 말하였다.
심사하(沈思河):효행(孝行)이 탁이함에 암행어사가 장계를 올려 참봉에 제수되었다.
심능문(沈能文):효우(孝友)와 학행(學行)이 있어 친병(親病)에 상분축천(嘗糞祝天) 하였고 飛鳩가 집에 들어와 끓여 드려 삼일간 회소(回甦)하였고 천거하여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심능광(沈能光):효행이 탁이하여 부모의 뜻을 승순(承順)하는 것을 수족같이 하였고 가난하다고 하여 감지(甘旨)를 폐하지 않았고 례조(禮曹)의 관문(官文)으로 기적비(記蹟碑)를 세웠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심능호(沈能浩):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를 봉양하는데 맛있는 것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가져다 드렸고 상을 당하여서는 삼년동안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고 추우나 더우나 질대(絰帶)를 풀지 않았고 비록 비바람이 불어도 반드시 성묘를 하고 제사 날에는 소식(素食)을 하니 향리에서 효자라 일컬었다.
심능섭(沈能涉):효행이 순지(純至)하였고 양친을 봉양함에 지체(志體)를 모두 봉양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준수하였고 삭망에 반드시 성묘하되 비나 눈이 온다고 폐하지 아니하여 삼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심의봉(沈宜鳳):효성으로 가정교훈을 이어 받어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았다. 부병(父病)에 주야로 약시중을 들었고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이 예에 지나쳤고 어머니 상에도 한결같이 전상과 같이 하였다.
심의성(沈宜成):부모를 효양(孝養)하였고 母病에 단지주혈(斷指注血)하여 수명을 연장시켰고 여러 번 향천에 올랐으니 사실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심의수(沈宜洙):천성이 순후(純厚)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승순하였고 집이 가난하였으나 맛있는 음식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상제(喪祭)에 예를 다하였고 벼슬은 가선대부의관(嘉善大夫 議官)이었다.
심능직(沈能直):천성이 순효하여 부모를 봉양하는데 정성과 힘을 다하였고 학문으로써 스스로 잘난 척 하지 않고 추향(趨向)이 바르고 지조를 지켜 고결함이 일반 사람보다 나으니 士林이 감복하였고 천섬(薦剡)에 오르고 가선에 추증되었다.
심린지(沈麟之):천성이 지효(至孝)하였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를 봉양하였다. 모병(母病)에 상분축천(嘗糞祝天)하고 단지할고(斷指割股)하였으며 어머니가 졸하자 슬퍼함이 지나쳤고 날마다 성묘하여 무릎 닿은 곳이 구덩이가 되었다. 여러 번 향도천에 올랐고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추증 되었으니 사실이 삼강록(三綱錄)에 올라 있다.
심병지(沈秉之):천성이 순효(純孝)하여 능히 선업(先業)을 이었고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 하였고 맛있는 음식 제공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아들의 직분을 극진히 하니 사림(士林)이 모두 탄복하였고 여러 번 천섬(薦剡)에 올랐다.
심상호(沈相鎬):어릴 때에 아버지가 출타하여 돌아오지 않으니 평생동안 애통하기를 초종(初終)장사 때와 같이 하였고 참판 송래희(宋來熙)에게 예를 물어 출타한 날을 돌아간 날로 삼아 집상 성복(執喪 成服)하고 초혼하여 선비묘역(先妣墓域)의 오른쪽에 축단(築壇)하여 묘사(墓祀)를 행하니 사실이 알려져 교관(敎官)에 증직되었다.
심능춘(沈能春):부모를 효성으로 섬겨 순종하고 애경하며 무리를 온화함으로써 다스려 가도(家道)가 정숙하니 향리에서 사람으로써 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였고 향도천에 올랐다.
〈효부(孝婦)〉
심 씨(沈 氏):이돈백(李敦伯)의 처로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고 시아버지가 죽자 삼년상을 예를 다하여 치르고 로고(老姑)가 이질로 몸져 드러 누우니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대 소변을 받아내고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니 여러 번 천섬에 올랐다.
沈 씨(沈 氏):김요신(金堯臣)의 처로 부병(夫病)에 단지하고 부사(夫死)에 수절하였다. 구수(舅讎)를 갚지 못하여 주야로 몰래 비니 수인(讎人)이 자수하여 깨끗이 갚았고 정려를 명받았다.
〈열행(烈行)〉
심 씨(沈 氏):변종달(邊宗達)의 처로 부병(夫病)에 지성으로 하늘에 빌었고 부몰(夫歿)에 상장(喪葬)을 예에 좇았고 항상 말하기를 남편의 뒤를 이을 사람이 다만 일고(一孤)가 있으니 내가 만약 하종(下從)하면 유고(遺孤:부모가 다 돌아가신 어린 아이)는 어디에 의탁하리오 하고 정구방적(井臼紡績)에 종사하여 근고(勤苦)하며 양육하여 문호를 번창하게 만드니 향린(鄕隣)이 감복(感服)하였다.
심 씨(沈 氏):나종문(羅鍾文)의 처로 성행(性行)이 정숙하고 효성으로써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병칠년(夫病七年)에 약이(藥餌)와 미죽(쭺粥)을 힘을 다하여 공급하였고 부몰(夫歿)에 하종(下從)할 것을 결심하고 칠일(七日)동안을 굶었으나 유고(遺孤)가 믿을 곳이 없음을 염려하여 아픔과 슬픔을 참고 종신토록 절개를 온전히 하고 능히 문호를 보전하니 사실이 오륜행실록(五倫行實錄)에 실렸다.
심 씨(沈 氏):나맹순(羅孟淳)의 처로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천성이 정숙하였다. 시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지나쳤고 부병(夫病)에 하늘에 빌어 대신 죽을 것을 원하였고 卒하자 하종(下從)하려 하였으나 로고(老姑)가 말리므로써 삼년을 시묘살이 하였고 시어머니 喪에도 또한 전과같이 하여 여러번 천섬(薦剡)에 올랐다.
〈문묘직원안(文廟直員案)〉
심능구(沈能九):庚戌 10月 피임(被任)되어 壬戌 2月 해임하였다.
〈총묘(塚墓)〉
심우신(沈友信):참판 묘(參判 墓), 삼서면(森西面) 봉서동(鳳棲洞) 동록진좌(東麓辰坐)에 있고 사패례장(賜牌禮葬) 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고 산지면적(山地面積)이 십삼정보(13町步)임.
심종하(沈宗夏):증승지 묘(贈承旨 墓), 남면(南面) 馬嶺里(馬嶺里) 작약동(芍藥洞) 해좌(亥坐)에 있고 표석(表石)이 있으며 산지(山地) 면적이 오정보(五町步)임.
심인순(沈仁淳):군수 묘(郡守 墓), 북면(北面) 성덕리(聖德里) 사산(沙山) 유좌(酉坐)에 있고 석물(石物)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