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군읍지

심 주(沈 澍):그 어머니 홍씨(洪氏)가 그 남편 정언 세림(正言 世霖)이 일찍 죽은 것을 통석(痛惜)하게 여겼는데 또한 남편의 친구가 모두 세화(世禍)에 걸려 주(澍)의 과거공부(科擧工夫)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하니 주(澍)가 드디어 독서(讀書)에만 전념(專念)하고 출세(出世)하려는 학문(學問)을 일삼지 않았다. 조중봉(趙重峰)이 일찍이 시(詩)를 지어 보내어 말하기를 서당(書堂)의 가을밤에 외로운 등불 비치니 옛날 현인의 책을 대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겠지 피곤하여 조는 것은 모름지기 나쁘지 않은 것을 알겠는데 꿈속에 어찌 다행히 친한 벗을 보았을 까라고 하였으니 그 서로 알아주는 생각이 대개 이와 같았다. 뒤에 임진란을 만나 창의군 김천일(倡義軍 金千鎰)의 막하(幕下)에 가서 식량조달(食糧調達)하는 일을 맡아 의병(義兵)을 모아 南쪽으로 가다가 주(澍)가 병들어 종군(從軍)하지 못하고 전원(田園)에서 죽었으며 號는 한천(寒泉)이다.
심 척(沈 惕):仁祖朝 때 사람이다. 癸亥年에 仁祖가 반정(反正)하자 처음으로 학행(學行)으로 추천(推薦)되어 바로 현감(縣監)에 임명(任命)되고 여러 번 옮겨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그 後로 진취(進就)하는데 뜻이 없어 곧 군북석한촌(郡北石閑村)으로 돌아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적(賊)을 만나 끝내 굽히지 않아 화(禍)를 당하자 조정(朝廷)에 알려져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정려(旌閭)을 命받았다. 公의 서질 정부(庶姪 廷賦)의 처(妻) 李氏가 女子로서 매우 행실(行實)이 있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當)하여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그 남편이 포로(捕虜)가 된 것을 보고 드디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사실(事實)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命받았다.
심 조(沈 潮):심척(沈惕)의 족손(族孫)으로 號는 정좌와(靜坐窩)요 권상하(權尙夏)의 門에 종학(從學)하여 행의(行誼)가 독실(篤實)하고 경서(經書)에 밝았다. 영조조(英祖朝) 丁卯年에 특별(特別)히 교관(敎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날마다 많은 선비와 김용제(金慵齋)와 더불어 경서(經書)의 뜻을 강구(講究)한 것이 50年이었고 邑에 산앙사(山仰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