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도지(강원도2)

〈문과(文科)〉
춘천(春川)
심후택(沈厚澤):高宗朝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간(司諫)을 역임(歷任)하고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름.
고성(高城)
심원하(沈遠河):高宗朝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정언(正言)이었고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를 극진(極盡)히 하고 우애(友愛)가 두터웠으며 문사(文詞)가 풍부(豊富)하고 덕용(德容)이 온화(溫和)하여 일시명류(一時名流)가 그 門에서 많이 나왔고 문달(聞達)을 구(求)하지 않으니 향리(鄕里)에서 추중(推重)하였다.
강릉(江陵)
심보영(沈普永):正祖 癸丑 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현감(縣監)이었다.
원주(原州)
심희수(沈喜壽):宣祖 庚午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고 壬申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호당(湖堂)에 뽑혔고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서 좌상(左相)에 이르렀다.
홍천(洪川)
심일희(沈一羲):肅宗 辛卯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문과(武科)〉
고성(高城)
심로순(沈魯順):청종조(哲宗朝)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은 돈녕도정(敦寧都正) 이었다.
양양(襄陽)
심응익(沈應翼):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은 봉사(奉事)였다.
강릉(江陵)
심홍(沈泓):世祖朝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은 주부(主簿)였다.
심승조(沈承祖):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사마(司馬)〉
양양(襄陽)
심덕숭(沈德崇):中宗 丁酉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였다.
강릉(江陵)
심   두(沈 ):中宗 甲午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심종숭(沈德崇):明宗 丙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심장원(沈長源):宣祖 戊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심삼달(沈三達):生員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심달(沈達):進士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심복(沈福):肅宗 甲午 進士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사환(仕宦)〉
인제(麟蹄)
심   연(沈   演):肅宗朝에 벼슬이 공조참판(工曹參判)이었고 송학동(松鶴洞)으로 퇴거(退去)하여 生을 마쳤다.
횡성(橫城)
심상준(沈相俊):횡성군수(橫城郡守)를 역임(歷任)하였다.
〈음사(蔭仕)〉
춘천(春川)
심의한(沈宜漢):성품(性稟)이 순효(純孝)하고 문장(文章)이 숙취(夙就)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에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승진(陞進)되었다.
강릉(江陵)
심봉택(沈鳳澤):기개와 도량이 크고 성질(性質)이 순수(純粹)하며 글을 잘하였으나 世俗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지조(志操)를 지키며 스스로 즐겼고 유집(遺集)이 있다.
심승택(沈升澤):천자(天姿)가 영매(英邁)하고 소절(小節)에 불구(不拘)하고 만년(晩年)에 일당(一堂)을 지어 시문(是聞)이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고인의 한가한 뜻을 사모한 것이다.
심상일(沈相一):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였고 영리함이 뛰어나고 문예(文藝)가 숙취(夙就)하여 사교(私校)를 지어 몸소 교훈(敎訓)하였다.
〈수직(壽職)〉
삼척(三陟)
심재용(沈在龍):품성(性稟)이 염직(廉直)하여 영리(榮利)를 求하지 않았고 수직(壽職)으로 오위장(五衛將)이었고 자호(自號)를 죽헌(竹軒)이라 하였다.
정선(旌善)
심성택(沈聖澤):명민(明敏)하고 호학(好學)하며 부모(父母)를 효봉(孝奉)하고 高宗朝에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로 있다가 시대(時代)와 맞지 아니하여 전리(田里)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수직(壽職)으로 공조참판(工曹參判)이었다.
금화(金花)
심래상(沈來祥):자상하고 글을 잘했으며 수직(壽職)으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었다.
심홍지(沈泓之):수직(壽職)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문학(文學)〉
강릉(江陵)
심상호(沈尙顥):재기(才器)가 뛰어나고 태학(太學)에 추천(推薦)되어 들어가 경서(經書)의 뜻을 연구(硏究)하였으나 벼슬은 하지 못하고 관(館)에서 죽이니 사우(士友)들이 애석(哀惜)하게 여겼다.
심능조(沈能祖):천부적(天賦的)으로 순후(淳厚)하고 자상(姿相)이 단결(端潔)하며 일찍 문학(文學)과 필법(筆法)이 뛰어나니 상국이지연(相國李止淵)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옛날 순유(醇儒)도 이보다 낫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심봉택(沈鳳澤):벼슬은 의관(議官)이었고 일찍 정훈(庭訓)을 익혀 학식(學識)이 넉넉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을 궁구(窮究)하여 집을 지어 신어(信漁)라 이름하였다.
심용택(沈龍澤):벼슬은 참봉(參奉)이었고 자질(資質)이 온수(溫粹)하고 문사(文詞)가 박흡(博洽)하였다.
효생(孝行)〉
춘천(春川)
심성택(沈星澤):가빈친노(家貧親老)에도 父母를 잘 섬겼고 부병(父病)에 시탕(侍湯)을 정성껏 하였으며 하늘에 빌어 장수(長壽)할 것을 願하였다. 갑자기 집의 개가 한 마리 여우를 잡아와서 팔아 藥을 해드리고 범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아 뜰에 던져 끓여드려 효험을 보니 사람들이 효감(孝感)의 소치(所致)라 말하고 원근(遠近)이 차탄(嗟歎)하였다.
영월(寧越)
심경택(沈鏡澤):용의(容儀)가 풍수(豊秀)하고 어려서부터 이미(異味)를 얻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더니 장성(長成)하여 능히 아들의 직분을 다하였고 부병(父病)에 시탕(侍湯)을 정성껏 하고 모상(母喪)에 애훼(哀毁)를 예제(禮制)에 맞게 하고 아버지의 지체(肢體)를 봉양(奉養)하기를 50餘年에 일찍 이 어린아이 소리를 내더니 喪을 당하여서는 시묘(侍墓)살이 하며 고기를 먹지 않으며 이를 보여 웃지 않고 날마다 춥거나 덥거나 성묘하는 것을 고치지 않으며 아우 용건(龍乾), 용춘(龍春), 용궁(龍官), 용성(龍星)과 더불어 우애(友愛)가 더욱 두터우니 사람들이 일컫기를 월계옹(月溪翁)의 집에 일택 사용(一澤 四龍)이 있다하였고 사림(士林)이 표창하여 입각(立閣)하였다.
심승택(沈昇澤):성품이 항상 온순(溫淳)하며 부모(父母)섬기는 도리를 알고 늘 곁에서 모시고 쇄소응대(灑掃應對:청소하는 일과 어른을 잘 받들어 섬기는 일)하며 문안(問安)과 음식(飮食) 해드리는 것을 조석(朝夕)으로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표창(表彰)을 받았고 공부하는 여가에 의술을 배워 사람을 고친 공이 있으므로 여러 번 향천(鄕薦)을 받았고 벼슬은 통사랑(通仕郞)이었다.
심오택(沈晤澤):형제 五人이 효우(孝友)가 겸비하였고 조상의 묘가 원격(遠隔)하여 참배하지 못함을 깊이 한탄하고 때때로 높은 곳에 올라가 향배(向拜)하며 제사지냈고 형 섬기기를 엄부(嚴父)와 같이 하고 집안에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으니 사람들이 일컫기를 五鳳은 경외(敬畏) 할만한 친구라 하였다.
철원(鐵原)
심능빈(沈能彬):
〈열부(烈婦)〉
원주(原州)
심씨(沈氏):원신(元愼)의 처로 절사(節死)하여 정려(旌閭)를 명 받았다.
화천(華川)
심   씨(沈   氏):염효일(廉孝一)의 妻로 夫妻가 모두 칠십세에 부병(夫病)은 반년동안이요 妻 역시 병들었는데 남편이 죽은 뒤부터 음식을 전폐하고 남편 따라 죽으니 도에서 장계(狀啓)를 올려 高宗기축에 정려(旌閭)를 명 받았다.
금화(金化)
심   씨(沈   氏):길우철(吉佑喆)의 처로 어려서부터 효경(孝經)과 열려전을 잘 읽었고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예경(禮敬)으로 대하였다. 夫病이 위독(危篤)하자 단(壇)을 쌓고 하늘에 빌며 내 몸이 대신 죽기를 원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습렴제구(襲斂諸具)를 친히 스스로 재봉해 놓고 몰래 후정(後庭)으로 나가 목매어 남편 따라 죽으니 純祖丁巳에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명 받았다.
〈자선(慈善)〉
양구(楊口)
심   씨(沈   氏):길헌식(吉憲植)의 처로 나이 16세에 출가하였고 얼마 안되어 상부(喪夫) 하였으나 남편 따라 죽지 못하고 어린 아이가 성장함을 기다렸고 丙申년부터 무술년까지 흉년이 들자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노약자와 사방으로 흩어진 자를 구제하니 일경(一境)이 힘입어 편안해졌고 面里에서 시혜비(施惠碑)를 세웠다.
〈정선(旌善)〉
심흥섭(沈興燮):성품이 순후박애(淳厚博愛)하여 빈한(貧寒)한 사람에게 의식(衣食)을 준 것이 많아 가선(嘉善)을 제수(除授)하니 한일도 없이 은혜 받은 것을 싫어하여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아들 載天이 효행이 있어 표창을 받았다.
〈우거(寓居)〉
춘천(春川)
심우영(沈友英):
삼척(三陟)
심계삼(沈啓三):숙종조(肅宗朝)에 예안(禮安)에서 이사했다.
횡성(橫城)
심지한(沈之漢):만년에 그 아들 여택(欐澤)과 치악산하 간현(雉岳山下 艮峴)에 살다가 군북수백촌(郡北水白村)에 이사하여 평생을 살았다.
심흥택(沈興澤):이 고을 수령(守令)으로 있다가 퇴관(退官)하여 살게 되었다.
伊川(舊安峽)
심기원(沈器遠)‥만년에 래거(來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