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이숙(葡萄已熟: 포도가 이미 익었다)

포도는 원래 서역이 그 원산지로 중국에 둘어온 것은 한 대(漢代) 장건(張蹇)의 서역진출 이후부터라 한다. 그래서인지 포도는 중국인에게 수입 초기부터 귀물(貴物)로 여겨지며, 풍류재사(風流才士)들의 시문(詩文)소재로 일찍부터 애호되었다. 포도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다자(多子)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지만, 명초기 문인화가인 악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줄기가 수척한 것은 청렴함이요,
마디가 굳세 것은 강직함이요,
가지가 약한 것은 겸손함이요,
잎이 많아 그늘을 이루는 것은 어진 것이요,
덩굴이 벋더라도 의지하지 않는 것은 화목함이요,
열매가 과실로 적당하여 술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재주요,
맛이 달고 평담하며 독(毒)이 없고,
약재에 들어가 힘을 얻게 하는 것은 쓰임새요,
때에 따라 굽히고 펴는 것은 도(道)이다.
그 덕이 이처럼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니,
마땅히 국화, 난, 매화, 대나무와 함께 달려 선두를 다툴 만하다."

그래서 포도를 사군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이런 상징성과 더불어 포도는 비교적 단순한 색감과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문인화의 범주에 편입되는 듯하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포도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던 듯하니, 조선초기 대표적인 사인(士人)화가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포도 그림을 잘 그렸다 하며, 중기에는 영곡(影谷) 황집중(黃執中)이 나와 조선 묵포도화의 양식을 정립한다. 이후 포도 그림은 홍수주(洪受疇, 1642-1704), 이계호(李繼祜, 1574-1645), 심정주(沈廷冑, 1678-1750)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후기 문인들에게도 여전히 각광받아 왔다. 그 중 심정주가 바로 심사정의 부친으로, 현재가 포도 그림을 이렇듯 능숙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가학(家學)에 힘입은 것이라 하겠다.

화면 좌상단에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之"자 형태를 그리며 내려온 포도 넝쿨을 중심으로 잎과 열매가 조화를 이루며 진설되어 있다. 포도송이보다는 잎이나 넝쿨의 묘사를 중시하는 것은 조선시대 포도화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정태적인 포도송이보다는 잎과 넝쿨이 다채로운 필묵의 묘리를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을 살려내는 데도 적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포도송이와 잎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 내는 적절한 은현(隱現), 취산(聚散)의 묘미가 일품이며, 변화무쌍한 넝쿨의 동세는 전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만한 솜씨라면 현재를 조선후기 최고의 포도화가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듯 싶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