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저해합(荷渚蟹蛤: 연못가의 게와 조개)

연꽃이 만개한 늦여름, 어느 한적한 연못가에서 집게발에 털을 수북이 단 참게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갈대와 물풀이 깔린 연밭 사이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열심히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데, 아마도 먹이감을 찾는 중인 모양이다. 화사하게 핀 연꽃과 앙징맞은 참게가 어우러진 정감있고 평온한 정경을 현재가 특유의 방일(放逸)한 필치로 화폭에 옮겨 놓았다.

대상을 최대한 접근시켜 연꽃과 연잎, 게와 조개 등을 화면에 가득 채워놓았는데, 필묵(筆墨) 자체의 멋과 맛을 중시했던 현재가 자주 애용하는 시각법이다. 맑고 가벼운 담묵으로 처리한 연꽃 봉우리와 호방하게 쓸어내리듯 쳐낸 패하엽(敗荷葉)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고, 연꽃 봉우리를 살짝 수그려뜨려 화면 좌하단의 참게와 호응시키는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이에 화면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이어지는 대각선상에 화재(畵材)들이 물 흐르 듯 자연스럽게 놓이게 되어 산일(散逸)한 듯하면서도 통일감과 운율감이 내재되어 있는 독툭한 화면을 만들어 놓았다.

각각 경물의 묘사도 손가는 대로 부담없이 그려낸 듯 하지만, 파묵(破墨)과 발묵(潑墨)을 배합하고, 건습(乾濕) 농담(農談)을 조절하는 한편, 담채(淡彩)를 적재적소에 베풀면서 수묵화의 단조로움을 적절히 보완하고 생동감을 부여하여 작품의 묘미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현재의 탁월한 감각과 숙련된 화기가 십분 발휘된 수작으로, 지극히 고답적인 듯하지만 감각적이며, 무심하고 단순한 듯하지만 세심한 의도와 고도의 세련미가 내재된 작품이다. 바로 이런 점이 현재 화경(畵境)의 매력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문인화의 요체이기도 하다. 《표현양선생연화첩》에 장첩되어 있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