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초추묘(敗蕉秋猫: 찢어진 파초와 가을 고양이)

현재 영모화로는 보기 드물게 짙은 채색을 쓴 그림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풀밭에 여름 새 살이 찐 통통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네발을 모으고 점잖게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통통한 몸통은 짙은 먹을 사용하여 몰골묘(沒骨描)로 대담하게 처리했고, 얼굴과 목, 가슴팍과 배 부분의 흰털 표현은 호분과 간략한 윤곽선을 사용하였다. 고양이 모습이 흑백(黑白)의 묘(妙)한 대조 안에 놓여 있다. 더군다나 긴 꼬리가 둥그렇게 휘어 고양이 형상(形相) 전체를 타원형으로 만들어주어 원만함이 돋보인다.

고양이 꼬리 아래로는 한 마리 방아깨비가 다리를 곧추 세운 채 다음 동작을 준비하고 있다. 고양이 몸통의 괴체감 있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방아깨비는 가는 선으로 몸통의 윤곽선을 그리고 색을 약하게 넣었다. 강약경중(强弱輕重)의 대비가 고양이와 방아깨비의 묘사에서 잘 드러났다.

배경에는 여름내 높게 자란 파초가 있는데 잎이 많이 찢어져 나갔다. 아마 바람을 맞았던가 보다. 먼저 짙고 옅은 푸른색으로 파초의 형태를 만든 후 묵선으로 잎맥을 막힘없이 그어냈다. 다시 파초 뒤와 옆으로는 붉은 꽃을 점점이 찍어 넣었다.

그림 아래에는 바위 더미가 있는데 농묵과 굵고 호방한 윤곽선으로 처리하면서 푸른색으로 변화를 주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추일한묘(秋日閑猫)> (간송미술관 소장)와 기법적으로 비교되는 그림이다. "현재(玄齋)"라는 백문인장과 "이숙(頤叔)"이라는 주문인장이 차례로 찍혀 있다. (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