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모정(溪山茅亭: 산속 시냇가의 초가 정자)

이 그림도 『고씨화보(顧氏畵譜)』 제3책에 실린 원대 황공망(黃公望)의 그림을 토대로 이루어낸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주산을 배경으로 키 큰 나무들을 촘촘하게 세우고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세운 화보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왼편 위쪽에 주산을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배치했는데 담묵으로 거칠게 쳐내었다. 시냇가 넉넉한 터전 위에 간소한 모정(茅亭)을 세웠다. 최소한의 선으로 간결미를 강조한 모정에 잇대어 크고 작은 나무들을 뻑뻑하게 세워 오른편을 막았다.

침염수와 활엽수를 함께 배치했는데, 농담의 차이로 우거진 잎새들을 구분하고 쌍구나 일필(一筆)로 크고 작은 나무 둥치를 표현했다. 나뭇잎 표현은 화보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들을 자유롭게 조합해서 색다른 아취를 만들어내고 있다. 강안의 토파는 농담을 섞어 쓴 소부벽준으로 그 단편을 이루어 냈다.

이 그림은 기사년(1749, 현재 43세) 초가을에 사천 이병연을 위해 그린 것이다. (己巳孟秋, 爲槎川老人寫, 玄齋沈頤叔) 사천은 현재의 그림 스승인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지우(知友)였던 대시인으로 겸재와 시화상간(詩畵相看)의 고사를 빚어낸 당대 문원의 중심 인물이다. 아마 스승을 대하듯 노년의 대사백에게 드릴 운치있는 그림으로 그려낸 것인 듯하다.

현재는 이 그림을 그리기 한해 전인 1748년에 어진모사도감 감동 파출 사건을 겪었다. 명분사회에로 복귀하려던 희망이 깨져버린 후 현재는 내면적 성숙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남종화풍을 보다 철저히 이해하고 소화해 내려는 의지에서 이 <계산모정>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중년의 경험과 역량이 엿보인다.

"현재(玄齋)"라는 방형주문 인장과 "이숙(頤叔)"이라는 방형백문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다. (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