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추제(湖山秋霽: 호수낀 산에 가을비 개다)

남종문인화는 대상물의 사생보다는 대상에 의탁하여 자신의 심회를 표출하는 것을 더욱 중요시 여긴다. 따라서 고도로 이념화된 남종문인화를 지향했던 심서정은 대상의 형상성을 묘사하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고, 오히려 필묵(筆墨)의 지유로운 운용을 통해 내면의 정서와 흥취를 담아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호산추제〉는 심사정의 이러한 회화적 지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도와 경물의 묘사는 화보(畵譜)를 참고로 하고 있는 남종문인화풍이다. 따라서 형상의 사생이나 대상의 본질을 옮겨내는 전신(傳神)의 관점에서 본다면 별반 취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 먹을 묻혀 그려 낸 분방한 난시준(亂柴皴)과 농담(濃淡)과 건습(乾濕)의 필묵(筆墨)을 섞어가며 묘사한 근경의 나무 표현에서 대상의 묘사보다 묘사 행위와 이에 수반된 필묵 자체의 느낌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현재의 작화태도를 감지할 수 있다. 《표현양선생연화첩》에 장첩되어 있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