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려섭천(騎驢涉川: 나귀 타고 개울을 건너다)

화창한 날씨에 나귀를 타고 나들이 나선 선비 일행을 화사하고 담담한 필치로 표현한 그림이다. 앞선 일행은 나귀를 끄는 마부가 경험이 많은 듯 쉽게 물을 건너 말위에 앉아 있는 선비가 여유롭게 뒤를 보고 있다. 하지만 뒤따르는 일행은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고삐를 힘으로 잡아 끄는 구종(驅從)과 물속으로 들어가기 싫은 나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나귀의 뒷다리와 이를 불안하게 보고 있는 말 안장 위의 선비 모습이 흥미롭다.

바위에 의지해 자라고 있는 굵은 둥치의 소나무와 양쪽의 바위 절벽 등에서 오파(吳派) 화가인 당인(唐寅, 1470-1523)의 <계산어은도(溪山漁隱圖>를 연상할 수 있다. 당인은 구영(仇英)과 함께 다른 오파 화가들과는 달리 부벽준(斧劈皴)과 발묵(潑墨) ․ 파묵(破墨) 등의 강한 묵법을 주로 사용하고 무쇠를 구부려 놓은 듯한 모습의 소나무를 자주 등장시켰는데, 이 그림에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왼편 상단에 표현된 짙은 녹음의 호초점(胡椒點) 역시 당인이나 구영과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이다. 오른편 상단에 조롱박 모양의 인장이 매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근경의 생동감 있는 인물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吳)